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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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신앙과 사랑으로 돌아가자!: 허 로무알도 신부 07-10-14 21:41: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890   
월피정 강론 (04. 6. 6)

신앙과 사랑으로 돌아가자!

날이 무척 덥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아무리 좋은 말도 제대로 들어올 리 없습니다. 여러분들에 대한 최대의 선물은 그저 재미있고 짧게 끝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수련원 형제들은 잘 모르겠지만, 수사님들은 제가 항상 재미없고 소화되지 않는 말만 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저도 이미지 쇄신을 꾀하고자 나름대로 노력도 해 보았지만, 잘 되지는 않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했듯이 생겨먹은 게 그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제 이름, 허 로무알도에서 ‘로’ 자를 빼니, 허무알도가 되어서 강론이 더욱 허무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피정 강론 시작을 ‘허무’란 말마디로 잡아 보았습니다. 허무에서 출발하여 우리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앞 다투어 추구해야할 바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 들어 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인생이 허무하다’란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특별히 주변 분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 측면인데, 곧 허무주의입니다. 이것은 고질병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빠지면 기운이 빠지고 삶이 무의미해지고 심지어 자살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바탕을 둔 경우입니다. 이 경우 ‘인생이 허무하다’란 말은 이 세상의 유한성과 우리가 향해야 할 지향점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인생을 더욱더 값지게, 감사하게, 적극적으로 살게 해줍니다. 이는 참된 신앙인이 갖게 되는 태도일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가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만사 헛되도다.”라고 했을 때도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인생이 참으로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새 훌쩍 흘러가버릴 시간들 앞에서 아옹다옹하고 또 어떤 원대한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 자신이 때론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주님의 계획이 다른 데 있다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확신합니다. 삶과 죽음 역시 그분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살고 싶어도 혹은 더 빨리 죽고 싶어도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섭리에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실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순간순간이 은총이요 감사입니다. 그래서 그냥 무의미하게 때워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됩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하고 또 기쁘게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서로 다투고 인상 찡그리고 산다는 것이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왜 이 짧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자문해 봅니다.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목표와 방향을 잘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엉뚱한 것을 위해서 힘과 정력, 그리고 고귀한 시간을 쏟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올바른 목표 설정이 중요합니다. 그런 다음 거기에 따른 방향이 제대로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각자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을 위해 나의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힘 쏟아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가치들과 인간적인 업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로마에 있을 때 시칠리아의 한 베네딕도회 수녀원에서 성탄 방학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 수녀원은 지속적인 성체흠승 수녀원으로서 24시간 성당에 성체현시를 해놓고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끊이지 않고 성체조배를 합니다. 대개 유럽의 전통적인 베네딕도회 수녀들은 봉쇄수녀들로서 입회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한 공동체 안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평생을 보냅니다. 우리와 같은 휴가라는 것도 없습니다. 지극히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의 온 삶을 주님께 투신합니다. 제가 방문했던 그 수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정원도 산책할 공간도 없고 오직 건물 하나와 수백 년 된 성당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성당과 식당, 작업장 등 공동공간과 독방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어떤 한 노 수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시(2000년) 94세로 그 공동체에서 최고령자였습니다. 원장 수녀님이 그 수녀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수녀님은 14살에 현재의 수녀원에 들어와서 5년 전 89세 때까지 75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새벽 2-4시까지 같은 시간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5년 전에 건강이 악화되어 현재 병실에서 지내게 되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일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지 의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누가 한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했다고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75년 동안, 그것도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과연 인간의 의지로 어떻게 가능한가? 제게는 하나의 기적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할매 수녀님이 살아 있는 성녀와 다름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비록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녀원의 봉쇄구역 안에 철저히 감추어져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투신한 그 분은 분명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며 성녀라 확신합니다. 철저하게 감추어진 삶 속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일평생을 바쳐온 그분의 삶 자체가 바로 위대한 순교라 생각됩니다.

과연 이런 일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사랑과 신앙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깊은 신앙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이름 없는 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서 참으로 신앙과 사랑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는가?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부수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어 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어떤 거창한 사업이나 명예, 외적인 화려함과 요란스러움은 아닐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위해 목숨 걸고 투신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외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서 이탈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인간은 말라 버리고 마는 풀과 같고 그 영화는 지고 마는 들꽃 같다고 한 바 있습니다(1베드로 1,24-25 참조). 그 어떤 인간의 업적도 영화도 또 현재의 삶도 결국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직 신앙과 사랑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채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과 사랑의 정도에 따라 우리 운명은 좌우될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에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 짧은 시간들, 그래서 더 귀하고 값진 생명의 시간들을 잘 사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과 가치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이렇게 불편하게 사는 우리는 모두 행복과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신앙과 사랑 안에서만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안에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야말로 참으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허무한 인생에서 시작하여 결국 신앙과 사랑까지 왔습니다. 허무한 인생 잘, 알차게 살아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 미련 없이 따라 나설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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