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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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리스도왕 대축일-나해: 인 끌레멘스 신부 07-10-14 21:23: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056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03.11.23)

왕, 군주라 하면 유일무이한 절대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옆 나라 일본은 천왕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왕이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왕이 있는 나라에서 왕이란 절대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하나의 상징적인 역할만을 합니다. 그렇지만 전 세계 어디에 가도 왕은 엄연히 존재하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왕은 눈에 보이는 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 사상, 권력, 재력이 바로 오늘날 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 오늘날 왕은 자기 자신이라고 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합니다. 뭐든지 자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눈으로 봐야하고, 자기 귀로 들어야 하고, 자기 잣대로 판단해야 하고, 자기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마치 자신이 죽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위해, 내 밑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 누구든지 내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 사람을 말로써,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하여 억누르려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자신이 우상인 시대인 것 같습니다. 내 자아가 성장해야 한다, 내가 완성되어야 한다, 남보다 더 배워야 한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려고 우리 자신을 학대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 왕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열흘 전 우리 수도원에서 연세가 가장 높으신 노 아르놀드 신부님이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몇 형제들과 함께 시신을 모시려 갔습니다. 신부님의 방에 들어가니 신부님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계셨습니다.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부님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옷을 입히기 위해 벗은 몸을 봤습니다. 육신은 가냘팠고 보잘것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젊었을 때 만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본당에서 본당 신부님으로 힘 있게 사목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지신 다음에는 가장 나약하고 가장 낮은 모습이었습니다. 시신을 옮기는 저처럼 젊은 형제의 손에 당신 몸을 내맡기셨습니다. 죽은 이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몸만이 덩그렇게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육신도 남의 손에 내맡기고 맙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우리의 끝은 모두 같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보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중심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라는 왕은 그 자체가 허상이고 껍데기뿐인 우상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내 자신일지라도,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 순간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를 보더라도 우리 힘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갓 내어난 우리를 받은 것도, 또 갓 태어난 우리 몸을 씻은 것도 다른 사람의 손이 했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다른 사람의 손으로 관에 눕게 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땅에 묻히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 모여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유일하고 참되고, 우리 자신을 투신할 왕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만이 우리의 임금이십니다. 이분만이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우리를 생명으로, 진리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을 확장하는데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왕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왕이십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세상 만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우리는 사제의 입을 통해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단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루하셨도다.”


베네딕도 성인은 말하기를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형제를 섬기면서 희생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실 요즘 우리 신자들 사이에는 자기희생이라는 덕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우리 자신도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우리 자신도 희생되어야 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처럼, 내가 죽어야 다른 형제들이 삽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형제를 내 중심으로 삼아 그 형제를 섬길 때마다 주님의 나라가 점차적으로 이 땅에 완성될 것이고, 또 자기희생을 할 때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군주 중에 군주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 미사를 지냅니다. 조금 있으면 예물 봉헌 때 우리는 한 해 동안 우리가 땀 흘려 가꾼 수확물을 왕이신 주님께 온전히 내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바칠 예물 중에 가장 빛나고 값있는 예물은 우리가 형제를 위해 우리 자신을 내놓는 희생입니다. 이러한 자기희생을 주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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