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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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제 목 :  연중 제15주일(나해, 2015.7.12.)-고 이사악 신부 15-07-13 08:22: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707   

연중 제15주일

(마르코 6,7-13)

수도원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일 년에 한 번 꼴로 방을 바꾸거나 이사를 했습니다. 평소에는 가진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 이삿짐을 정리하다보면 숨어 있던 물건들이 끝도 없이 나타납니다. 몇 년 동안 입지 않은 옷들, 책장 한 번 넘겨보지 않은 책들, 포장을 뜯고도 사용하지 않았던 전자제품들, 용도별로 마련된 신발들. 가난하게 살겠다는 수도서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청지원장으로 수도생활에 갓 입문한 형제들을 가르칠 적에 청빈을 무척이나 강조했던 터라 혼자 옮기지 못할 정도로 쌓인 이삿짐을 보면 자괴감마저 듭니다. 그 시절 저는 언제든지 한 시간 이내에 자신의 짐을 정리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가진 게 많거나 어디에 집착하고 있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민첩하게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수도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 비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여정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먼 길을 떠나려면 행장이 가벼워야 하는 법입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도리어 짐이 되고 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리 꼼꼼하게 짜 놓은 계획마저 여행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여행을 나설 때는 행장도 행장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마음이 가벼워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뿐 아니라 의지와 지성과 감성마저도 주님께 맡기고 홀가분하게 길을 나서야 합니다. 버리고 떠나는 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어디에도 얽매임 없는 한없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는 제멋대로 사는 방종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이나 고통, 혹은 핍박이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신명을 바쳐 온전히 자유의지로 자신을 투신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의 기본 조건은 가난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면, 이 가난은 청빈(淸貧)을 넘어서 적빈(赤貧)의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은 궁핍이나 궁색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소유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려면 물질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이 아닌 새로운 인연으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입니다. 세상과 맺고 있는 인연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의 발걸음은 방향을 잃게 되어 결국 이 여정의 목표인 하느님 아버지께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행의 목적을, 선포와 구마와 치유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지상 활동은 크게 복음 선포와 치유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고, 또한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을 이룹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이 꿈꾸던 이상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조그만 나눔을 통해 큰 기적이 일어나는 나라입니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살벌한 생존의 장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실현되는 상생의 장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받고 하느님께서 하느님답게 섬김을 받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받들기도 하고 인간을 짐승이나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려면 우선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상에 현혹된 우리 삶을 하느님을 향해 돌려야 하고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주인 자리를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실천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그 자리에 평화가 이룩되고 생명이 꽃을 피웁니다. 충만한 기운으로 모든 이들의 결핍과 부족이 채워지고 어긋난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으니 하느님 나라는 치유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치유는 다른 말로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너무도 우울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기쁨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러 오는 주일미사에 마치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사라져가는 기쁨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지난 4,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36%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조사 대상자 중 3분의 1 정도가 우울, 불안, 분노 같은 정서적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520, 유엔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을 맞아 전세계적으로 실시된 조사 결과는 우리의 심각한 내면상태를 말해줍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세계 성인 행복지수는 평균이 100점 만점에 71점이었으나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59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순위가 143개 나라 중 118위에 머물렀다는 결과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단군이래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 정작 기쁨은 우리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10만 명당 30명을 웃도는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나라 자살률을 보면 우리사회에서 판치고 있는 악령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대량소비주의, 성공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같이 인간을 욕망에 충실한 노예로 만들어, 세상을 끔찍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우리 시대의 악령들입니다. 이를 분별하고 몰아내지 않고서는 결코 기쁨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우상들도 사회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핵발전, 군비경쟁, 민족주의, 국가주의, 개발지상주의 같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것들.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과 대적해야 하는지 분별해내야 합니다.

악령을 몰아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선으로 위장하고 있거나 선과 교묘히 섞여 있는 악령을 분별하여 적나라한 정체를 밝혀버리면 끝납니다. 빛이 생기면 어둠이 사라지듯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령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사실 구마는 치유의 조건이면서 선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선포는 예수님의 제자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며 핵심을 이룹니다. 선포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은 단호합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예수님의 요구하는 선포는 보통 용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가축을 키우던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었던 아모스 예언자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미 받은 은사이자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의 직무는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하늘의 영적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강론을 마무리 하면서 기쁨을 전하고 악령을 몰아내며 사람들을 치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또한 이 사명을 우리의 일상 안에서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은총이 완성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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