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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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제 목 :  연중 제 26주일(다해, 2013.9.29.)-고 이사악 신부 13-09-30 10:10: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495   

다해 연중 제26주일

루카 16,19~31

 

한동안 저를 보는 사람들마다 왜 머리를 깎고 사냐고 물어왔습니다. 대부분 중년의 자매들이 그런 질문을 자주 했는데 그러면 저는 이렇게 되묻곤 했습니다. “자매님은 왜 빠마를 하고 사시나요?” 제가 머리를 깎는 이유는 첫째 머리 손질하는 데 드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고, 둘째는 약간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깨도 구부정하고 팔자걸음이라 초면에 사람들이 나를 얕잡아 보지 못하게 미리 선수를 치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삭발을 하면 누구나 한 5년 정도 젊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동안을 원하시는 분들은 보톡스 주사를 맞을 게 아니라 삭발을 한 번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삭발로 나이를 속인다 한들 오는 백발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두어 달 전에 니꼴라오 수사님께서 복도에서 저의 뒤통수를 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고 이사악, 이제 나랑 같이 늙어지려고 하네. 흰머리 좀 봐라.” 머리가 길어지면 부쩍 늘어난 새치를 숨길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도 중학생 같은데 올해로 제 나이가 마흔입니다. 이제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이 비슷해져 갑니다.

 

잠자리에 누우면 문득 지나간 세월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다고 뭐 그리 특별한 인생은 아닙니다. 시골에서 그럭저럭 사는 집에 태어나, 술 잘 드시는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살림이 풍족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없었습니다. 역경이나 시련 같은 말은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입시에서도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연애를 해보지 못했으니, 실연의 아픔도 당연히 모릅니다. 천성이 게으른지라 학생시절에는 백수가 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권하는 대로, 졸업하면 자동으로 직장이 보장되는 대학을 택하는 바람에 그 꿈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남들은 보장된 미래를 부러워했지만 스스로는 답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실에서 펜대나 굴리며 무려 삼십 년이나 넘게 살아가야할 내 인생은 너무나 평탄하고 밋밋한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첫 월급을 받고는 행복했습니다. 월급이 나올 때마다 적금을 부었습니다. 쌓여가는 잔고를 보며 기뻐했습니다. 무엇을 소유한다는 게 그렇게 기쁠 줄은 몰랐습니다. 구차하게 집에다 손을 벌릴 필요도 없고, 내 맘대로 써도 되는 돈이 생겼습니다. 통장을 꺼내보며 흐뭇해했습니다. 곧 행복한 부자가 될 것 같은 기대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 정도면 복 받은 인생이라며 자부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다른 사람들도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굴곡진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난, 슬픔, 아픔, 부끄러움, 좌절.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이런 말들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내 일이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 한 몸 챙기면 그만이라는 태도는 수도원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신서원을 1년 앞두고 필리핀으로 연수를 다녀올 때까지 내 시야는 내 발 앞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있는 디고스 수도원에서 한 달을 머무는 동안 처음으로 힘겨운 인생들을 만났습니다. 아침마다 누이동생과 함께 커다란 물통을 들고 수도원에 물을 길러 오가던 꼬마가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길가 구석구석 허름한 좌판을 펼쳐놓고 쪼그리고 앉아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안쓰러웠습니다. 어느 날은 패스트푸드 매장에 들어가 햄버거를 먹는데, 유리창에 머리를 대고 안을 들여다보는 헐벗은 아이들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민망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동안 왜 저런 이웃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두고두고 자신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은 굳이 제3세계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며 2012년 기준으로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전국에 82만 가구, 139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이 백만 명이나 넘게 있다는 말입니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내년 최저생계비가 4인 가족 기준으로 163820원입니다. 그런데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빈곤층인데도 기초수급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무려 400만 명이나 됩니다. 물론 그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정도로 가난하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있는 열사람 중 한 명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지난 78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탈리아 람페두사에서 불법 이주민들과 미사를 거행하면서 하신 강론 말씀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은 안락만을 추구하는 문화가 오직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개탄하면서 무관심의 세계화를 언급했습니다. “나한테는 영향이 없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건 내 일이 아니야! 하고 말하면서, 우리는 이웃들의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으며 이웃들의 울음에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보고도 같이 울어줄 줄 모르고 연민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듭니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이를테면 사람답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호화로운 그의 삶이 심판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은 이유는 그의 집 대문 앞에서 굶어 죽은 라자로라는 거지 때문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면 충분했을 조그만 자선조차 그에게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기 집 대문 앞에 누가 있는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건강이든, 재물이든, 아니면 다른 탈란트이건 간에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누리는 것을 죄라고 단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긴 것이지 개인이 독점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이 축복은 책임이 따르는 선물인 것입니다. 축복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누릴 권리가 있는 동시에 자신을 통해 그 하느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드러나도록 노력해야할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에 참석한 모든 분들도 하느님의 축복을 이미 받은 분들입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서 각자가 하느님에게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하느님께 받은 축복에 취해 살지 마시고 주위를 두루 두루 살피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가난에 찌 들린 사람,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한마디로 불쌍한 이웃들을 연민의 눈으로 대하면서,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연민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연대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할 때, 세계화된 무관심으로 삭막해진 세상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바뀌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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