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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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제 목 :  부활 제6주일(다해, 2013.5.5) - 김 폴리카르포 원장신부 13-05-11 04:18:5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603   

2013년 5월 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어린이날, 立夏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金鐘弼 폴리카르포 修士神父

 

오늘은 부활 제6주일, 성모성월이요 가정의 달인 5월의 첫 주님의 날입니다. 5월 5일인 오늘은 ‘어린이 날’이요, 절기상으로 입하(立夏)입니다. 5월의 달력에는 좋은 인간관계와 아름다운 자연과의 건강한 상호작용으로 거룩한 하느님을 닮을 날들이 많습니다. 8일은 어버이 날, 10일은 유권자의 날, 11일은 입양의 날, 15은 스승의 날이며 가정의 날, 17일은 부처님 오신 날, 18일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19일은 발명의 날, 20일은 성년의 날이며 세계인의 날, 소만(小滿)인 21일은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 날, 25일은 방재의 날, 31일은 바다의 날입니다. 전례력으로 5월의 첫 주일은 부활 제6주일로 생명 주일, 둘째 주일은 주님 승천 대축일, 셋째 주일은 성령강림대축일, 넷째 주일은 삼위일체대축일이며 청소년 주일입니다.

 

사노라면 아주 특별한 선물처럼 가슴이 뭉클해지는 새벽을 맞이하게 되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열린 창을 넘어오는 이채로운 새들의 소리가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정신을 일깨웁니다. 주님의 날, ‘생명 주일’인 오늘도 그런 감성과 이성으로 아침을 향해, 하루를 향해 열린 새벽을 맞았습니다.

어제 저녁기도 전에 수도원 객실에서 잠시 만났던 ‘딸과 아버지’의 영상이 잔별처럼 마음의 창공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딸은 어려서부터 ‘급성 림프 모구성 백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중학교 2학년이 된 방다희 엘리사벳의 시집 「희망의 온도계」를 펴들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아주 자그마한/ 한 송이의 예쁜 꽃// 어느 누구나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자신의/ 꽃 같은 마음// 그 누구도 아직까지/ 자신도 모르는 마음속/ 꽃 한 송이의 이름// 하지만 나는 보았다네./ 그 마음속 꽃의 이름은/ ‘희망’이라는 꽃이라네.”(방다희, ‘희망’)

부모님의 헌신적인 극진한 사랑이 자녀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겠지만, 방다희란 중학생이 자기 자신의 고통보다 희망을 읊은 시를 탐독하면서 새벽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 제1독서인 사도행전(15,1-2.22-29)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백성이 서로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 지침을 마련하여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 결정은 사도들과 원로들의 인준을 받아 서신 형식을 통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지역 공동체들에 전달됩니다(사도행전 15,22-35).

인종과 풍속이 다른 두 집단이 어떻게 평화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가?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복음사가’의 교회관에 따르면, 견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의 지혜와 분별은 이렇습니다. 원칙적인 문제는 시대의 징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살펴 결정하고, 부수적인 문제들은 형제애와 양보심을 발휘하여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제2독서 요한 묵시록(21,10-14.22-23) 21장의 말씀 중에 ‘천상도성의 장엄한 출현’(10-14절)과 ‘하느님의 영광’(22-23절)에 대하여 만납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는 거룩한 현존을 위한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이제 주님과 통교가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영적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입니다.

 

 오늘 복음인 요한 복음(14,23-29)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별만찬(최후만찬) 중에 남기신 ‘평화’의 말씀을 만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런 ‘평화’를 주시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십니다. 공관복음에서도 ‘평화’는 단순한 인사보다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는 종말론적 구원 개념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옴으로써 사람들에게 선사되고, 예수님의 말로 각 사람에게 전달되며,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평화는 부활 후에도 예수님의 선물로 강조됩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의 수난시기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적용되는 선물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에도 ‘평화’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소서 2,14-17)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가 선포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오늘날 우리 지구촌의 현실에 반영된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보서 3장 18절)라는 말씀처럼 참 평화의 몫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로 이어집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오 5,9) 여기서 중학생인 방다희 엘리사벳의 ‘평화’란 시(詩)를 함께 음미해보고 싶습니다.

“산에는 초록빛 나무가 있고/ 바다는 푸른빛 바닷물이 있고/ 하늘에는 하얀빛 구름이 줄지어/ 바람을 따라서 지나가네.// 이 모든 것들이 모두다/ 자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세상은 정말로 ‘평화’로운 것 같아.// 싸우는 사람들/ 남 탓만 하는 사람들/ 자기말만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착해지고/ 새 마음을 갖는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더 ‘평화’로워 질 거야.”(방다희, ‘평화’)

 

평화의 길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갈등으로 부침하는 인류 역사가 평화의 여정이 얼마나 힘든지 말해 줍니다. 세상의 평화는 사람마다, 민족마다, 나라마다 다릅니다. 다양한 욕망만큼이나 진정한 평화의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이루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복음 20장 21절)는 파견 소명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평화를 위해 제각기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시편의 시인은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시편 85장 11절)고 읊습니다.

우주적인 사랑만이 우주적인 고통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주적인 사랑으로 우주적인 고통을 껴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라는 말 안에 인류의 온갖 고통과 번민, 역설과 모순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장 6절)이신 예수님의 사랑은 치유의 원동력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모든 고통까지 포용하는 우주적인 속량을 바랍니다(로마 8장 22-23절 참조).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장 38-39절) 우주를 정화하는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이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강론은 방다희 엘리사벳 중학생의 ‘예수님’이란 시(詩)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살며시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베품을 전하네.// 하늘을 바라보면/ 누군가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꿈을 꿀 때마다는/ 나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시고는 사라져 버리고// 드디어 나는 만났네./ 따뜻한 손길로 나를/ 인도해 주는/ 예수님을・・・・.”(방다희,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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