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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제 목 :  연중31주일(나해, 2012.11.4))-김 폴리카르포 원장신부 12-11-10 07:17:0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356   

2012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일/ 성 가롤로 보르메오 주교 기념 없음

 

가장 큰 계명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

김종필 폴리카르포 수사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만나는 가장 큰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그 표현은 바라보기에 좋고, 기대하고 싶은 매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그 길로 투신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국문학자요 민속학자인 길열규 교수님이 쓴 「한국인의 자서전」이란 책의 ‘사랑 - 아리디아린 쓰디쓴 그것’이란 장에서는 “아리디아린 쓰디쓴, 사랑에서는 진한 소태맛이 난다. 짜도 예사 짠맛이 아니다. 거기다 맵디맵다. 그래서 사랑은 맵짜다.”라고 사랑을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중세 국어에서 사랑은 곧 생각이었다. 지금과 같은 뜻의 사랑은 ‘괴다’였다. 명사로는 ‘굄’ 또는 ‘괴임’이라 했다. 그러던 것이 근세에 들어와서 ‘생각하다’를 의미하던 ‘사랑’이 ‘굄’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 생각은 사고(思考)고 사려(思慮)다. 깊이가 있고 무거워야 하는 게 생각이다. ・・・・ 우리들은 사랑이 고뇌하는 것,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노역이고 중노동이란 것도 알아차린다. ・・・・ 사랑은 물론 상호 거래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희생으로, 또는 일방적인 헌신으로 사랑은 공역(功役), 곧 공들임으로 또 공사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난공사 없는 크나큰 건설이 없듯이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전설은 공들임! ‘공든 탑’을 쌓아올리는 것이 사랑이기도하지만, 눈물로, 피눈물을 쏟게 하는 것이 사랑이니만큼 사랑을 매섭게 여기고 또 두려워하라고 우리들에게 일러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이제 ‘사랑이기만 하기’를 그만 두었고, 생식기능도 이미 상당 부분 포기했으며, 생식기는 없고 쾌락과 장삿속이 크게 흥청거리고 판치는 거래인 성기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랑은 난공사인 ‘공들임’이나 ‘공든 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한국인의 자서전」 118-121쪽 참조)

 

성경에서,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주제로 ‘하느님과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낭독되었던 구약성경 「아가」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6-7)

구약성경 모세오경의 첫째권인 「창세기」에는 성조 이사악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윈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창세기 24,67)

 

그럼 여기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 제1독서인 신명기(6,2-6)의 말씀 중에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기 6,5-6) 이 구절들에서 ‘들어라!’와 ‘오늘’이라는 단어에 이끌립니다. ‘장수’와 ‘번영’의 비결이 이 말씀의 실현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 제2독서인 히브리서(7,23-28)의 말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 이끌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주십니다”(25절).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28절). 늘 살아 계시고 대사제이신 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12,28ㄱㄷ-34)에서는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율법 학자’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꾸며서 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 중에 몇몇 가지만 둘러봅시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온 육신과 영혼과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분이신 참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은 모든 거짓 신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오리게네스). “말로써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위-클레멘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떨어질 수 없기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베다). “지혜와 용기, 절제, 정의 같은 모든 덕목은 이 두 가지 (사랑의) 계명으로 아우러진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만나는 가장 큰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 최대의 과제입니다. 내려감의 길로, 마침내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다시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고난은 인생의 아버지다. 인내는 인간살이의 어머니다. 그 둘 모두는 우리를 땀에 절이게 한다. 때로는 피땀에 얼룩지게 한다. 땀은 삶의 생명수 같은 것이다.”(「한국인의 자서전」 278쪽에서) 부활을 꿈꾸는 삶의 날에 수난과 죽음의 여정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시 묵상합니다.//壬辰年 위령성월에 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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