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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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2021.04.06 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 - 고 이사악 신부님 12-04-07 14:43:4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451   

성 금요일이 오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정확히 5년 전 오늘, 성 금요일 새벽, 수도원에 불이 났습니다. 그날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를 대충 수습하고 거행했던 성 금요일 전례가 매우 인상 깊이 남아있습니다. 잿더미가 된 수도원 건물을 옆에 두고 거행되었던 주님 수난 예식이 뭔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폐허 속에서 움트는 생명의 신비랄까요. 하여간 주님께서는 우리가 화재로 인하여 겪었던 고통에 비해 많은 것을 다시 주셨는데, 그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널찍한 새 성당입니다. 작년에 성삼일 전례를 준비하는 저를 보고 이사악, 성당이 넓어져서 굉장히 좋지라고 하신 니콜라오 수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정말이지 예전에 그 좁은 성당에서 얼굴을 맞대고 복닥거리며 전례를 거행할 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아주 신선놀음입니다.

화재 후 성당을 새로 짓고 나서 전례거행이 훨씬 나아졌다는 것과 더불어 다른 변화 한 가지는 수도원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는 것입니다. 올해도 많은 분들이 수도공동체와 함께 파스카 성삼일 전례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수도원이라는 이미지가 세상 사람들 눈에 신비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수도원과 연관되면 뭐든지 특별하게 보이나 봅니다. 색다른 수도원 전례가 좋아 수도원을 찾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수사님들이 만든 성물이 독특하다며 성물방을 찾는 분도 있습니다.

성물방에는 우리 수도원에서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많습니다. 가령 요한 수사님이 정성스럽게 만드는 묵주와 공예초, 그리고 왜관 수도원의 별미인 분도 소시지가 그렇습니다. 그중에 이냐시오 수사님이 만든 진복팔단이라는 특별한 십자고상도 있습니다. 십자고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진복팔단 십자고상에는 예수님이 껄껄 웃는 얼굴로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이따위 고통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입니다. 보는 분에 따라서는 어떻게 십자가에서 사람이 웃을 수 있느냐, 너무 현실감이 결여되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십자가를 보면 괜히 마음이 편해집니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분이 오히려 웃고 있으니, 그분을 바라보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덜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면 고통과 죽음을 달관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한 구원을 상징하고 죽음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다 구원에 대한 희망 혹은 부활에 대한 기쁨이 떠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 먼저 드는 게 현실적인 감정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이사야서 말씀처럼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셨고, 우리 때문에 벌을 받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분이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분이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인자가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밝히셨으니, 우리가 많은 죄를 짓고도 하느님에게 벌을 받지 않는 것은 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덕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난 고해성사 때 고백한 죄들, 예를 들어 부모님께 불효하고 자식들에게 화를 냈고,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직장동료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웃어른 험담을 하고 또 주일미사를 자주 빠진 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우리들의 자질구레한 개인적 과오들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매년 성 금요일이 오면 우리는 마치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라도 되는 양 비통해하고 가슴 아파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붙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셨습니다. 로마제국의 자유민들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은 주로 제국을 위협하는 불순분자, 그들이 날강도라고 불렀던, 독립투사들을 응징하는 도구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새로운 영성을 불러일으킨 참신한 종교 지도자로 보지 않고 제국을 전복시킬 위험을 가진 정치 지도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스스로 내린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님을 정치적인 인물로 보게 만들었던 부류들은 바로 대제관들과 일부 율사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 협조하면서 종교를 빙자한 권세와 이익을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던 하느님 나라가 당장 지금 이 자리에 실현되면, 율법과 성전을 기반으로 하여 쌓아온 그들의 기득권이 송두리째 날아가기 때문에, 불순한 사상을 유포하던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또 다른 공범들이 있습니다. 바로 군중들입니다. 아까 수난 복음에서 들었던 없애시오, 없애버리시오,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라고 목청껏 부르짖었던 그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이 그분의 적대자로 돌변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이런 상반된 군중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의 권모술수는 똑같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여론을 조작하여 그를 제거하는 수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군중들은 바리사이들의 율법과 사두가이들의 성전제의가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임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기득권자들이 뿌려주는 떡고물에 마음이 혹하고 그들이 조작해내는 정보에 귀가 쏠립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들과 공조하여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정의를 실현했다고 뿌듯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많은 예수님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목숨을 내놓기는커녕 그들을 위한 변호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정치라며 종교인들이 간섭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금을 그어놓고 대신 기도나 열심히 하자고 말합니다. 대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허울 좋은 핑계를 가져다 대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고발하여 죽일 빌미를 찾아내었던 대제관 가야파가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그들과 함께 열심히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이시오, 없애시오, 쓸어버리시오.”

학문과 기술은 끊임없이 진보하는데도 인간의 역사는 늘 되풀이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끊임없이 희생양들의 피와 눈물을 요구합니다. 인류가 무수히 반복하는 과오와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그랬듯이 오늘도 약하고 여린 이들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이들의 희생에 무책임한 방관자로 있어야 합니까? 오늘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하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이 과연 누구인가? 또한 무죄한 하느님의 종에게 고통을 주는 바리사이와 대제관들은 누구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시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택이 또 다른 의인의 죽음을 불러오지 않도록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어린 양들의 희생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완전한 세상, 곧 정의와 평화의 임금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루빨리 오도록 다함께 힘을 모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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