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왕 대축일 

강론

묵상을 하려고 성당에 앉아 있으면 가끔 엉뚱한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졌다면, 십자가 대신 성당 천장에 올가미가 대롱대롱 달려 있지 않았을까? 혹은 예수님께서 참수형을 당했더라면 회자수의 칼이 그리스도교의 상징물이 되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는 많은 물건 중에 왜 하필이면 치욕스러운 처형도구였던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초대 교회에서 십자가는 승리와 생명의 표지라는 상징적인 의미만 지녔을 뿐, 신자들이 십자가를 그리거나 형상화시켜 공경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십자가 대신에 여러 가지 형태의 기호들이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에 등장했는데, 지금처럼 고통 받고 고뇌하는 예수님이 달리신 것이 아니라,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허리에는 금띠를 둘렸으며 머리에 왕관을 쓴 평온한 모습의 예수님이 달려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보다는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죽음을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신학을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상황인 죽음까지 굴복시키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세상을 다스리는 자 곧 왕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사실 말하자면 죽음은 인간이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세계 역사상 아무리 위대한 군주라 할지라도 죽음까지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임금 중에 임금이요 군주의 군주이신 분입니다.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당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초연하고 평화로운 얼굴에 기꺼이 죽음과 대면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두 눈을 뜨고 두 팔을 펼친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예수님께서 쓰셨던 왕관은 가시관으로 바뀌고, 평온하던 예수님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으며, 십자가는 생명의 승리 곧 부활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고난과 죽음의 표지로 변했습니다. 

십자가 형틀에서 고통 받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위엄을 되찾은 것은 1925년 12월 11일 교황 비오 11세가 발표한 Quas Primas란 교서 덕분입니다. 비오 11세는 이 교서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요 인간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 지상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지닌 왕이라고 천명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 왕직의 의미를 성대하게 기리도록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교회는 전례주년이 끝나는 연중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성탄과 부활 대축일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한 사건을 기념하는 전통적인 축제가 아니라, 그분의 구원업적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성찰하는 현대적인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민족의 압박에서 구원해줄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 왕처럼 탁월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 영화로운 시절이 다시 한 번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이와 같이 왕으로 오시는 구세주에 대한 인식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되었고, 로마당국으로부터 십자가형을 받게 된 실질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고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정복했고 다스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세속적인 재력이나 권력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진리와 정의만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는 선택 받은 소수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민족과 나라와 언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 이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복음 선포로 시작되었으며, 복음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모든 요소들이 지상에서 없어지는 그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죽음의 공포로써 세상을 정복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왕들과는 다른 분입니다. 예수님의 통치수단은 사랑입니다. 백만 대군의 무력으로도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죽음의 세력을 사랑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이겨냈습니다. 예수님은 짓밟고 억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얼음을 녹이는 따스한 봄기운처럼 사랑으로 생명과 죽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녹여버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이 선포했던 복음 정신은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탐욕으로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녹이는 온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아름답게 변하며 언젠가는 주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느닷없이 닥치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을 준비하며 늘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깨어 있는 정신으로 늘 그날을 준비하고 아울러 예수님의 방식대로 차갑고 냉랭한 세상을 품고 녹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 심판 기준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랑의 실천을 제시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이란 나와 관계없더라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면 누구나 해당됩니다. 굶주린 이에게는 먹을 것을, 목마른 이들에게는 마실 것을, 나그네들에게는 따뜻한 환대를, 병든 이에게는 간호를,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위로를 주면서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은 심판과 죽음을 이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두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그날이 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원수인 죽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날에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아래서 자유와 해방을 만끽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은 끝이 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품어야할 희망과 기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