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오로 플라치도 대축일

바보의 길

2011년 1월 15일-가

마태 14,28 – 33

오늘은 저희 사부, 성 베네딕도의 두 애제자 성 마오로와 플라치도 대축일 입니다. 동시에 다섯 명의 형제가 하느님과 성인들 앞에서 종신토록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 공동체는 매년 이날 종신서원식을 거행하는데, 오늘 이 축일에 종신서원을 하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베네딕도 성인의 새로운 제자가 탄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원을 발하는 형제 쪽에서는 성인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찾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매우 뜻 깊은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뜻 깊은 날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한 때 이런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종신서원 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무엇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는 것인가? 이 날은 성대하게 보다는 오히려 조용하고 소박하게 서원의 의미를 마음 깊이 되새기며 비장한 각오로 임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날을 축하해야 하는 참된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을 본받고 그 가르침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이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의 길은 낮아짐으로써 올라가고 비움으로써 채워지고, 죽음으로써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길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가능하면 더욱 더 올라가려 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 바동거리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바보의 길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의 길이 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쉽게 경쟁과 대립, 절망과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반면 바보의 길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최근 이 바보의 길을 충실히 감으로써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을 심어준 분들을 알고 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그렇고 또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고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습니다. 그분들이 걸어가신 길은 세상의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고 또 밑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메마른 우리 마음에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삭막한 우리 사회에 사랑의 위대함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수도자가 하는 서원이란 이 길을 가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수도서원은 바로 이 바보스런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문과도 같습니다. 수도자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선택한 세상의 바보입니다. 오늘 종신서원을 하시는 수사님들은 이 바보의 길을 선택했고 이제 잠시 후 그 길을 걷겠다고 공언할 것입니다. 바보 바보 하니 어떤 분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 바보인가, 바보가 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누가 그럽니다. ‘바보’는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의 줄임말이랍니다. 한편 일리 있는 말입니다. 수도자가 이 길을 충실히 갈 때 분명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 대해 바보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참된 바보의 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가능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 제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끊어버려라.”(4,10) 스승 예수를 따르는 이 길은 자기로부터, 온갖 인간적 욕망으로 가득 찬 거짓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수도서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와 죽음을 표현합니다. 수도전통 안에서 수도서원은 옛 인간에 죽고 새 인간으로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제2의 세례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서원예식 안에는 죽음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바닥에 엎드린다든지, 그 위에 자색 보를 씌운다든지, 심지어 서원역사 안에서 관까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서원장을 손수 작성하여 제대 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서원예식의 절정이자 핵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듯이 나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이 행위 역시 자기희생과 죽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분명 하나의 이벤트가 아닙니다.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하겠다는 비장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오늘 종신서원을 하게 될 수사님들은 수도생활 초기에 가졌던 순수와 열정을 잃지 마시고, 또 지금 이 순간의 각오 마음을 잊지 말고 계속 키워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인격과 삶이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참된 바보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여러분이 걷게 될 이 바보의 길은 분명 세상에 빛이 되어 어둠을 비추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도저히 이 고독하고 외로운 바보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수사님들은 “하느님 자비에 대해 결코 실망하지 말라.”(성규 4,74) 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바보의 길을 가다가 때론 지쳐 주저 않거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자비에 희망을 두고 넘어지면 힘을 내어 다시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또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그리스도와 베네딕도 성인을 본받아 새로운 바보가 탄생하는 이 뜻 깊고 경사스런 날, 우리 모두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바보의 길로 들어선 다섯 분의 형제를 축하하고 그 기쁨을 나누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