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0년 11월 21일-다

루카 23,35ㄴ-43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이며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아직 달력의 마지막 장이 앞으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것이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자체에 마디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제 뜬 해와 오늘 뜬 해가 다르지 않지만 사람들은 하루를 가르고 한 달을 가르고 한 해를 가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세월의 길이를 재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날과 달이 새로울 수는 없어도 우리 스스로가 새로워지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세월을 끊어놓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연말이라는 느낌이 들기 이전에 조용한 가운데 또 한 해를 정리해보고, 특히 내 신앙의 한 해를 정리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우리가 지내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흔히 왕이라고 하면 크고 화려한 궁전이나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런 왕의 모습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는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왕궁에 거하시지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왕이라고 분명히 나온 경우는 단 한 번, 그것도 오늘 복음에서 읽은 대로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그분에게 명시적으로 왕이란 칭호가 붙은 것이 십자가 위였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것 같은 그 순간, 화려한 옷 대신 가장 비참하게 상처투성이 알몸을 하신 그분의 모습에, 백성의 환호 대신 온갖 조롱이 난무하는 그 가운데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팻말이 붙습니다.

물론 그 팻말을 만든 자들의 의도는 분명히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 팻말뿐 아니라 실제로 말로 조롱하는 세 무리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다인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종교 권력, 군인들로 대표되는 정치권력 그리고 예수님 왼편의 죄수로 대표되는 대중들이 예수를 조롱합니다. 한결같은 조롱의 내용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스스로를 살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죄수조차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메시아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조롱 내용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막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내용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시오.”라는 유혹의 내용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라는 조롱은 너무 닮아있습니다. 마땅히 예수님 최후의 유혹이라 부를 만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을 정말 왕궁으로 모셔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듯이 사람들의 조롱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 우편의 죄수가 “예수님, 당신 나라로 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청에 “그대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의 왕국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분이 왕이신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가장 처참하게 그리고 무력하게 죽음을 끌어안으시는 그 모습이 그분을 참된 왕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온전한 인간이 되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모습이고, 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셔서 가난하게 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그리스도는 왕이시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왕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이 끝난 다음에 구름에 쌓여 천사들을 대동하신 모습으로만 기다린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헛된 기다림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도 종교 권력자들이나 정치 권력자들처럼 우리 옆에 오신 그리스도를 못 박으며 조롱할 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유다 백성도 화려한 왕으로 올 메시아만을 찾다가 예수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우편 죄수에게 “그대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끝 날이 아니라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요,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우리 신앙이 또 한 해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