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 나연수 베다 수사님 종신서원 미사 강론

루카 10,25-37

방금 복음 시작에 흥미로운 문답을 들었습니다. 율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바로 대답하시지 않고 율사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습니까?” 그러시더니 율사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율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사는 물러가지 않고, 이웃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예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 옛날 율사와 같이 하느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이중계명은 대단히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특히 유대교신자와 회교신자들도 그 길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신자들에게 제시되는 구원의 길은 더 구체적입니다. 우리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과 이웃을 섬기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저 율사처럼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면 그 분이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신자는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옛 제자처럼 물리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우리 모범으로 따라갑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신자들은 예수의 추종자입니다. 그러나 예부터 교회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왔습니다. 어떤 신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면서 예수님의 정신으로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생활양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모방합니다. 예수님처럼 독신으로 살고, 집이나 다른 재산을 포기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수도자’라고 합니다. 오늘 종신서원하는 나 베다 수사가 그 길을 택하였습니다. 자기가 그 길을 택하였다기보다 주님께서 자기를 택하셨다고, 주님께서 자기를 이 길로 부르셨다고 베다 수사는 오래 전부터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생활 가운데도 여러 가지 방법, 여러 가지 생활의 틀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500여 년 전에 베네딕도 성인이 그러한 틀, 예수를 따라가는 구체적인 틀을 마련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정한 생활의 특성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한 곳에 살면서 규칙에 의해 하루의 일과를 보내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생활.’ 베네딕도 성인은 이런 틀을 마련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훌륭한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 가운데 제4장을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라고 불렀고, 이는 ‘선행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4장에서 베네딕도는 73개의 도구 또는 선행을 열거합니다.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이 도구를 사용하는 하나의 작업장 같은 것으로 봅니다. 이 도구들의 제일 앞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 이웃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 이는 이미 구약성서에 나온 지극히 보편적인 이중계명입니다.

그러나 베네딕도 성인이 생각한 이 수도원이라는 틀 또는 작업장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실천할 수 있지만 베네딕도 회원들은 상당한 시간을 하느님을 공동으로 찬양하면서 보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시간을 낭비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 많은 시간에 성당에서 하느님을 위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교회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더 효과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택한 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대단히 좋고 뜻있는 일입니다. 또 이웃사랑의 특색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할 대상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혈연이 아니고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아니라 같은 작업장의 동료들입니다. 우리가 수도원에서 만나는 동료 중에 잘 맞는 사람도 있고 차라리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정주서원으로 일생 동안 같은 사람과 살면서 계속 서로 받아들이도록, 계속 사랑으로 서로 섬기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종신서원하는 베다 수사는 우리와 함께 수도원이라는 이러한 작업장 안에 살기로 했습니다. 이 수도원이라는 틀은 좁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틀이 좁을수록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넓으면 이 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한 선배로서 말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마련한 이 틀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께 맡기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 베다 수사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수사님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생활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