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루가 9,18-24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대답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하는데,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더러는 어느 옛 예언자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합니다.” 그러면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하시니,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무라시며 아무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곧, 인자는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와 대제관과 율사들한테서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흗날에 일으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입니다.”

도입부

  우리 겨레의 아픔이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60년이 됩니다. 벌써 한 갑자가 지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듯합니다. 오늘 교회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남북한 상대방을 향한 증오가 하루 빨리 사리지고, 갈라진 겨레가 하나 되어 이 땅에 평화가 흘러넘치기를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도록 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반성합시다.

강론

  원로 수사님들께서 듣기에는 우스운 소리겠지만, 제가 수도원에 들어온 지 올해로 십년이 지났습니다. 수도생활로 강산이 한 번 바뀔만한 세월을 보낸 이 시점에서, 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동안 나름 성격도 많이 활달해지고, 세상과 사람 보는 안목도 넓어졌습니다. 수도생활을 택하기를 잘했다는 자부심이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깎이지 않은 부분이 나를 찌르기도 하고 같이 사는 형제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모자라는 구석이 많다는 점을 살아갈수록 뼈저리게 느낍니다. 또한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곤혹스럽습니다. 때론 다정다감하면서도 돌아서면 매정하고, 꼼꼼하면서도 어떤 때는 얼렁뚱땅 대충 넘어갑니다. 원칙을 부르짖는가 하면 어느새 당연하다 듯이 예외를 허용해 버립니다. 과연 어떤 모습이 나의 참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흔히 삶이 힘에 겨울 때 찾아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잠도 안자며 궁리하여 해답을 얻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은 이 질문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허무의 세계로 몸을 던져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저 역시도 문득 문득 찾아오는 이 질문을 회피해 버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속을 들여다보아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같이 사는 형제들에게 “형제님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당신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구약의 예언자 중의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부정을 의미합니다. 군중들이 당신의 정체를 잘못 알고 있다는 암묵적인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의 대답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요 구원자라고 인식한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다양한 예수님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랍비들처럼 회당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의사 노릇도 했으며, 악령을 쫓아내는 일도 자주 했습니다. 굳이 예수님을 어떤 인물유형에 맞추려면 구약의 예언자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곧 들이닥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던 예수님의 모습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던 구약 시대 예언자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긴 해도 예수님은 예언자와 다른 면모를 지녔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전달자로 자처하였지만, 자신은 그 말씀 뒤에 숨어버립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나’, ‘나의 말’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후 기다리거나 홀연히 사라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다리지도 숨지도 않으며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 있는 지휘관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행동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오실 그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했던 예수님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무슨 운동을 벌이듯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로마 당국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요샛말로 운동권으로 보였습니다. 그분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불안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외딴 광야에 장정들만 오천 명을 모이게 할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 바로 앞에 나오는데,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성전중심의 경제 질서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 당국자와의 야합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말라고 부탁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마나 치유 기적을 베풀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가끔은 자신의 행방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광야에서 군중들을 만났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도 낮에는 공개적으로 토론을 하면서도 저녁때만 되면 성 밖의 미지 공간으로 몸을 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펼치고 있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유대 지도층과 로마 당국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예수님은 반죽한 밀가루 속에 든 누룩처럼, 세상 속에 깊숙이 숨어서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고자 했을 것입니다.(루카 13, 20-21참조)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정치적으로도 비칠 수 있겠지만 그 목적은 결코 정권획득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 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른다고 정치적 권세를 비판하였습니다.(마르 10,32 참조)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말하는 메시아는 끊어진 다윗 왕조를 이어서 새로운 왕조를 창업할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개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마르 12,37) 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방인들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목 놓아 기다리던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착취와 억압의 기존체제에 대항하여 나눔과 섬김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힘이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인 풍요에 있지 않고 사랑과 희생에서 나온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돈 한 푼 없이도, 그것도 황량한 광야에서 나눔을 통하여 오천 명이나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루카 9,10-17 참조). 그리고 인자 곧 메시아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러 온 사람이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마르코 10,45 참조)

  그분은 구원자는 군림하고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는 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몸소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이 신념을 지켰고, 아울러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어야 하는 구원자의 모습, 이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선생이며, 치유자요 구마자이기도 했으며 혹은 예언자로 오해받기도 했던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형상아래 하나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볼 때 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민중을 위하여 희생되신 여러 어른들의 삶이 겹쳐집니다. 그 중에 특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는 오늘 같은 날에는 김구 선생이 떠오릅니다. 선생께서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내면서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타지를 떠돌며 사셨던 분입니다. 조국이 광복된 후에 민중들은 그분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야말로 오실 그분이었습니다. 환국 후 선생께서는 삼팔선을 베고 누워버리겠다며 남북공동정부 수립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그분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겨레는 쪼개졌고, 6.25전쟁이라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친일파와 미국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이들은 그분을 꺼렸습니다. 선생은 권력의 하수인이 쏜 총탄에 희생되셨습니다. 안타깝기만 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며 제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는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그리스도들 보다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김구 선생의 소원대로 우리 겨레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