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중 제6주일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김종필 폴리카르포 수사신부

  오늘은 ‘설’입니다. 또한 오늘은 주님의 날인 주일입니다. 우리 수도원 공동체는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 등 말씀의 전례를 연중 제6주일의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 이 날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마치 눈을 감고도 알아차리게 되는 대나무 마디처럼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인위(人爲)로 자리매김한 설은 새해의 첫날입니다. 설은 한겨레 한민족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혼과 얼이 새롭게 태동하는 날입니다. 또한 그러기를 희망하는 날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낯설음이 있기에 설은 ‘삼가하고 조심하는 날’이기도 하고, 문화와 인습의 전통에 따른 명절이기에 기쁨과 경건함이 함축된 날이기도 합니다.

  설 명절에는 의관(衣冠)을 차려 입고 조상 제례를 소중하게 거행하고, 단정한 몸가짐으로 어른들을 찾아 세배하는 미풍양속이 전례됩니다. 설 명절에는 홀로와 더불어 살아갈 세상사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함께 살아갈 서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공동체의 회원들과 조상들과 앞서 돌아가신 인연된 분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앞서 가신 분들의 영혼들이 주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청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나 가족은 현세에서 화목과 친교를 누리며 주님의 뜻에 따르는 행복한 삶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2010년, 단기 4343년, 경인년에 생각하는 범, 호랑이는 백호(白虎)입니다. 호랑이는 남성적인 양(陽)의 동물입니다. 그러나 백호(白虎)는 서방(西方)과 가을의 상징 동물로서 여성적인 음(陰)을 대변합니다. 평남 강서 구역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의 백호도나 경복궁 영추문의 백호도의 의미와 함께 여성의 중요성과 더불어 남성 안의 여성성으로서의 아니마(anima)가 의미 있고 비중 있게 시사됩니다.

  역경(易經)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호랑이와 바람의 관계, 신비한 권위, 범접할 수 없는 감독자를 암시하는 호랑이는 한편으로는 초자연적 용맹성, 강력한 조절자, 종교적 본능, 신령, 신성한 인도자 혹은 매개자, 희생과 헌신의 아니마(anima)의 상징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지배욕, 탐욕,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파괴적 본능, 부정적 아니무스(animus)의 상징입니다.

  섣달 그믐 밤이 지나고 정월 초하룻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행복할 때에는 불행을 잊고, 불행할 때에는 행복을 잊는다.”(집회서11,25)는 집회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인 루카복음 6장의 ‘행복선언’과 ‘불행선언’ 중에 ‘행복선언’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6,20-22)

  이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선포하신 루카복음 6장의 네가지 행복선언과 네가지 불행선언 중에 행복선언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있듯이, 루카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평지설교”(루카6,20ㄴ-49)라 합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산”(마태5,1)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산상설교”(마태5,3-7,29)라 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코1,15)라고 외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못난 자들이 지금은 비참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처지가 아주 달라지겠기에 그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이 곧 하느님의 나라를 펴시면 지금 참상이 크나큰 축복으로 뒤바뀌겠기에 그들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아끼셨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묻는 부자청년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코10 21)

  마지막, 네 번째 행복선언은 박해받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덧붙인 것으로 봅니다. 그 문체나 내용이 앞의 삼중 행복선언과 사뭇 다릅니다. 삼중 행복선언이 운문이라면 마지막 행복선언은 참상을 길게 늘어놓는 산문입니다. 그리고 삼중 행복선언에는 인간이 취할 자세에 대한 말이 없는 데 반해 마지막 행복선언에는 “사람의 아들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삼중 행복선언에서는 무조건 하느님의 나라를 약속하는 데 비해 마지막 행복선언에서는 정당한 보상을 약속합니다. 삼중 행복선언은 신론(神論)인 데 비해 마지막 행복선언은 그리스도론입니다. 네 가지 행복선언에 이어지는 네 가지 불행선언은 루카복음에만 있습니다.

  김열규 지음 ｢한국인의 자서전｣의 프롤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까?’ 어제의 답이 오늘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물어도 물어도 끝이 없는 물음. 오늘 새로이 던지는 이 물음이 내일을 나락(奈落) 밑창에 내팽개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게 최선이지?’ 물음은 정처 없이 굴러가기 마련이다. 끝도 없이 대굴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원한 물음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 책의 에필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고난은 인생의 아버지다. 인내는 인간살이의 어머니다. 그 둘 모두는 우리를 땀에 절이게 한다. 때로는 피땀에 얼룩지게 한다. 땀은 삶의 생명수 같은 것이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많은 일들을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 이 시간, 저에게는 지난 2월 1일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날은 성 베네딕도회 서울수도원(분원)에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본원)으로 소명을 받고 다시 들어와 살게 된 첫날입니다.

  그날 밤에 바라본 창밖 중천의 반달처럼, 언젠가 경남 고성 자란만 바닷가에서 본 돌에 새겨진 공룡의 발자국처럼 선연하게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20대 초반에서 90대 중후반으로 향하는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공동생활을 하며 함께 하는 기도, 작업, 식사, 휴게 등이 다 새롭게 그려졌습니다. 그때 일어난 생각은 “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 아니, 다 함께 잘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소명은 바로 “생명을 주는 삶”을 위한 섬김의 길이라는 자의식입니다.

  그날 밤에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 요한묵시록 7장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요한묵시록7,10.12) 말을 넘어서, 행위를 넘어서 존재의 자리에서 맑은 이성과 따뜻한 가슴으로 듣도록 일깨우는 진언(眞言)이 진동처럼 파장처럼 일어납니다. 매 순간마다 다시 깨어나도록 깨우쳐 주시는 목소리에 마음의 귀를 열게 합니다. 오직, “주님인 내가 너의 구원이로다!”라는 말씀에 힘입어 설날이요, 주님의 날인 오늘 다시금 새롭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庚寅年 설에 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