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오로와 성 플라치도 대축일에

-미사 중에 종신 서원 예식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김종필 폴리카르포 수사신부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오늘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종신서원을 하는 수사님(최춘배 시몬 수사님)은 우리 수도원 공동체에 계속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지입니다. 이때는 그가 부르심에 응답하고 지체 없는 순종으로 시작하여 달려온 소중한 한 사람의 수도자로 우리 공동체에 온전히 동참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수도자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하나의 불빛은 한 순간에 사방을 밝힙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정이나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는 슬기로운 처녀들 마냥(마태 25,1-13 참조), 깨어있는 사람만이 신랑과 함께 하느님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하느님 나라의 표지인 신앙인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는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우리 각자에게는 저마다 각기 고유하고 소중한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큰 가슴으로 결집된 우리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하나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운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미사 전례도 바로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거듭 새롭게 이루어지는 자리는 바로 오늘 여기입니다.

  우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지난 몇 년 간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한국 진출 백주년(1909~2009)” 기념의 해를 준비하고 맞이하고 마무리하면서 우리 공동체의 역량과 그 너머의 신비로운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진솔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내린 그 신비로운 은총은 이 땅의 남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과 봉헌회원들을 비롯한 보편 교회와 사회가 함께 하는 가운데 경험하게 된 은혜로운 선물이었습니다. 나아가 1500여년의 전통의 맥을 이어온 지구촌의 성 베네딕도회 후예들의 수장들이 한반도 한겨레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찾아와 잊힌 기억의 흔적과 좋은 추억으로 함께 했던 2009년 9월 25일은 은총의 때였습니다.

  오늘은 또한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의 제자, 성 마오로와 성 플라치도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주보성인 축일을 맞는 우리 왜관 수도원과 영명축일을 맞는 우리 공동체의 수도자들을 비롯하여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에게 축하드립니다.

  그레고리오 대종의「대화집」제2권 제7장에는 “베네딕도의 제자가 물 위를 걸어가다”라는 제하에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새벽 시간전례 기도 중에 독서로도 경청하게 된 얘기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혜안(慧眼)과 꼭 필요한 긴급한 조치로서의 명령, 그리고 강복을 청해 받고 지체 없이 순종하는 마오로, 상황이 잘 진행 되어 생명을 구하게 된 장본인으로서 공덕을 분별하게 하는 플라치도의 역할 등이 묘사된 미담입니다.

  이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오늘 복음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호수 위를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마태14, 27-31 참조)

  하느님 시현사화 양식으로 된 그리스도 시현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를 눈여겨봅시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있는 동안에는 그분처럼 물위를 걸어갑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 의심하기 시작하자 그만 물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문제없는 개인이나 공동체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문제없는 부부나 가정, 사회나 세상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런 기대나 꿈은 좋습니다. 하지만 실상 문제없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없습니다. 문제없는 부부나 가정, 문제없는 사회나 세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문제와 더불어 그 문제 한 가운데에서도 잘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은 모색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의 책임성과 친밀한 관계로 해결의 몫을 재탐색하고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길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길로 그 어떤 고통스러운 문제로부터 잠에서 깨어나듯이 거듭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브 융은 분석가들에게 “환자의 벽장 속에서 해골을 끄집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림자로부터 황금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깊은 통찰이 담긴 말입니까?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서로의 약점이나 결점, 실수나 실패에 메이기보다는 서로의 장점 · 강점 · 미덕에 눈과 귀와 가슴을 열어나가는 삶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너와 나의 그림자로부터 서로서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지혜가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소중한 거울입니다.

  참사랑은 거리[간격, 차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쏙 들고 맞갖은 조건이 충족될 때만이 아니라, 간격 차이 다름 별남 등등 도무지 수용하고 싶지 않은 난점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13,7)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에 굼뜨고 인내가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주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에 거행하게 될 종신 서원 예식 중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듣게 됩니다. 이 시간은 또한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 수도원의 그 질문들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사님(들)은 종신토록 정주(定住)할 것과 수도승답게 생활해 나갈 것과 순명할 것을 약속하겠습니까?”라는 물음입니다.

  첫 번째로, ‘정주(定住)할 것’은 뿌리내림입니다. 정주는 인간생활의 기본입니다. 정주생활은 도망치지 않고 뿌리내리는 삶입니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실제로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직면하고 묵묵히 대처해 나가는 삶입니다. 홀로와 더불어 공동체에서 생명을 주는 삶의 자리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수도승답게 생활해 나갈 것’은 곧 정진(精進)입니다. 정진은 변화에 개방적인 삶의 노력입니다. 청빈(淸貧)과 정결(貞潔)과 순명(順命)이라는 복음삼덕(福音三德) 중에서 청빈(淸貧)과 정결(貞潔)은 구도자에게 전제되는 기본으로 정진에 속합니다. 정진생활은 끊임없이 개방적인 삶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추스르며 죽을 때까지 영적 성장을 위해 언제나 처음처럼 생명을 주는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의지적인 노력입니다.

  세 번째로, ‘순명(順命)할 것’은 곧 순종(順從)입니다. 순명은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순명은 사랑의 태도입니다. 순명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순명은 서로 섬김을 위한 사랑의 길입니다. 순명서원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겸손으로 온전히 봉헌하는 것입니다. 순명생활은 생명을 주는 삶으로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순종(필리피서 2장 6-11절 참조)을 재현하는 삶입니다.

  “종신토록 정주할 것과 수도승답게 생활해 나갈 것과 순명할 것”을 약속하는 수도서원은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마르코복음 8장 35절)라고 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게 하는 투신의 도구들입니다. 이러한 수도서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파스카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코린토 전서 1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30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義) · 성화(聖化) · 속량(贖良)은 바오로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적인 결과를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들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유다인 실천가’로서, ‘회개한 열정가’로서, ‘떠돌이 선교사’로서, ‘공동체 조직가’로서의 삶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일상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즉,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라고 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肉)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5,13) 庚寅年 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