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짝수해)

루카 4,21-30

  그 때 예수께서 “이 성서 말씀이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모두들 그분에 대해 좋게 말하며 그분 입에서 나온 은총의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였다. 예수께서 “필경 여러분은 나를 빗대어 ‘의사야, 너 자신부터 고치거라. 가파르나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우리가 들었다. 그런 일을 여기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하겠지요.” 하시고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참으로 말하거니와, 삼 년 반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은 엘리야를 그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습니다. 또 엘리사 예언자 때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그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 말씀을 듣고 분통을 터뜨려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고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벼랑에까지 데려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도입부

  우리는 오늘 연중 제4주일 미사를 거행하면서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민중들을 기억합니다. 불과 한두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역시 배고팠던 시절을 겪었으며, 해외원조에 힘입어 굶주림을 면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부강해진 지금, 우리나라의 해외원조 실적은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시각을 넓혀 사랑의 실천이 국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최근에 일어난 지진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아이티 공화국에 많은 기도와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오늘 뉴튼 수도원에서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김 요한 보스코 신부님께서 영육간에 건강하길 기원하고, 또한 이 미사에 참석한 울산 우정본당 청년 교리교사 여러분들이 피정을 통해 체험한 바를 토대로 하여 앞으로도 기쁜 마음으로 본당 공동체에 봉사해가길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강론

  지난주에 고향에 가서 일주일간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저녁미사를 부탁받았습니다. 출신 본당에서 모처럼 만에 미사를 드린다고, 오후 내내 집에서 강론준비를 했건만, 성당에 갔더니 고작 열 명 남짓한 교우들만 나와 있었습니다. 휑한 성당이 너무 썰렁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사를 집전하면서 아, 나도 이제 예수님처럼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날이 우리 마을에서 이장을 뽑는 날이었고, 옆 마을에는 어촌계장을 뽑는 날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 역시 공소가 있는 산간마을에서 교우 두 분이 이장선거에 나왔다가 그만 다툼이 생겨, 중재하러 가셨습니다. 미사에 나온 분들도, 손님신부가 왔는데 신자들이 너무 적다는 사무장의 호출을 받고 마을회의 중간에 빠져나온 본당 사목평의회 간부들이었습니다. 일이 공교롭게 꼬여서 그랬지, 그렇다고 고향에서 냉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미사를 마치고 저녁식사도 대접받았고, 식사도중에 제가 했던 강론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들으면서, 제 자신이 아직도 고향에서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처럼만에 고향에 가셨다가 곤혹을 치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들을 일으키고,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면서, 민중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다녔던 예수님에게 이 사건은 요즘 인터넷 용어로 굴욕이라고 할 만합니다. 예수님의 나자렛 굴욕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서를 읽고 나서 말씀하기 시작했을 때,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하거나 무시하는 투가 아니었습니다. 모두들 그분에 대해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온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끝에 단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꼬리표가 화근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 한 동네 살던 목수 요셉의 아들이 도를 닦는다고 홀어머니도 팽개치고 집을 나가더니, 이제 제법 도사 티가 나는구나. 아마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꼭 이랬을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외지에서 출세하거나 성공한 인물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곤 하는데, 예수님께서도 고향사람들의 그런 기대의 눈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고향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각광받는 신흥종교계의 거물로 금의환향한 동네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자신을 예언자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이 단순히 치유나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소명이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한마디로 풀어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읽은 이사야 예언서의 내용도 이를 말해줍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로잡힌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려 왔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묶여 있던 하느님의 말씀을 풀어 모든 나라의 백성이 듣도록 했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이들을 풀어주었고, 병고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아울러 잘못된 종교제도와 정치제제에 억눌려 살던 민중들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었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맛을 보여주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려했지만,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고향사람들로부터도 외면 받았습니다.

  종교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현상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기이한 현상이나 쫓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추종하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앉아서 입으로만 값싼 은총이나 구걸하는 태도를 신앙이며 믿는 자세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우리가 완전해지기 위해서이고, 이는 다름 아닌 하느님과 하나 됨을 말합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것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기심과 욕망 같은 본능적인 차원, 불안과 공포 같은 심리적 차원, 질병과 고통 등 육체적 차원, 또한 인습과 편견과 고정관념 같은 사회적이면서도 개인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구속과 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방과 자유를 제멋대로 사는 방종과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조화롭고도 평화롭게 살아가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은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아가가 이 경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완전한 사람은 우리 내면에 있는 사랑 즉 자비심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너그럽고 친절합니다. 시기하지 아니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하지도 않고, 자기 것만을 챙기지도 않습니다. 좀처럼 화내는 일도 없고 원한도 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지만, 불의를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승리할 때까지 믿고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겠지만,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미래에 완성될 모습입니다. 우리가 얽매어 있는 여러 가지 구속과 억압에서 해방되기만 하면 금세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런 구속에 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보다 더 힘센 존재에게 의탁하여 사는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시야를 초월적인 차원으로 넓히고 은총을 받아들이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은총이란 어떤 형태로 고정되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삶의 조건들과 우리가 발견해내는 은총의 씨앗들, 곧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요소와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처한 조건이 아무리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더라고 이 은총의 씨앗과 결합되면 은총이라는 결실을 맺고 맙니다. 이렇게 매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사람들과 사건 속에 놀라운 보배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밝히고 눈을 크게 떠서 이 은총의 씨앗들을 잘 찾아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은혜로운 시간으로 변화됩니다. 모쪼록 이 미사에 참석한 모든 분들의 일상 안에서 은총의 씨앗들 특히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강론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