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수도원 안팍은 2년 전 화재가 난 후 재건 공사로 어수선하지만, 조금 남은 수도원 정원은 온갖 꽃들이 생명의 환호를 올리고 있습니다. 여리고 여린 나뭇잎 싹이 옅은 청록색으로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황홀하고 찬란합니다. 끝기도가 끝난 다음 정원을 홀로 거닐 때 저는 생명의 움직임, 생명의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봄이 시작되는 이 시각, 그리고 보름달이 떠오르는 오늘 저녁,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식탁인 제대를 중심으로 모여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셨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식사의 기원은 제1독서로 들은 탈출기에 잘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직전 그날 밤,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위대하신 하느님의 해방을 고대하던 식사에서 나왔습니다. 해마다 같은 날 이 회식을 할 때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던 하느님의 이 해방 사건을 현재화하고 또 미래에 완성될 완전한 해방을 미리 앞당겨 경축했습니다. 우리는 이 식사를 ‘파스카’ 또는 ‘파스카 회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오늘 저녁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더불어 회식을 하시면서, 옛 이스라엘의 옛 파스카를 당신 자신과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 모두의 파스카로 새롭게 제정하십니다. 사실 파스카라는 뜻은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어디서 어디로 건너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상태의 억압에서 자유 상태의 해방으로 건너갔듯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도 주님과 함께 건너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뒤를 쫓아 건너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가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마지막 운명의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최후만찬이 마치자마자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고뇌의 기도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시고, 체포당하시고, 온갖 심문과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 선고를 받으십니다. 그리고는 무거운 십자가를 다 헤진 몸에 지시고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 못 박혀 큰 소리를 지르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으신 후 사흘 만에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고 지금은 온 우주의 주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파스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입니다. 죽음의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건너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파스카를 우리의 파스카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 밤 당신이 마련하신 만찬 상 둘레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이 식탁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우리에게 내어주시면서 당신이 가신 파스카의 신비를 우리의 삶과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길을 가셨고 또 왜 우리를 이 길로 가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오늘 복음으로 들은 요한복음 13장 첫 구절에서 잘 나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파스카 축제 전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끝까지 사랑하셨다.’ 저는 이 구절을 듣고 읽고 노래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낍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절함이랄까 안타까움이라할까 예수님의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니 강론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그토록 애절히 사랑하시는 주님께 눈물과 고마움이 앞섭니다. 바로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제 자신의 눈물과, 그리고 이토록 사랑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제 자신을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그 애절한 사랑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사랑은 펼치고 활짝 열고 풀어주고 나누고 치유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움츠러들고 닫아걸고 조이고 달아나고 숨고 독점하고 해치는 에너지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에너지 자체이셨기 때문에, 더러운 우리 발을 손수 씻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치유시켜주셨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당신 몸과 피를 모두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부활에 참여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파스카는 바로 사랑의 건너감입니다. 만일 주님이 두려움에 지배를 받으셨다면 파스카는 결코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밤 주님께서는 당신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 자체가 되느냐 아니면 두려움 자체가 되느냐를 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사랑을 선택합시다. 그러나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지는 맙시다. 사랑의 행위를 하려고 노력하지는 맙시다. 그러면 분명히 실패하고 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주님께서 나한테 베푸시는 그 사랑에 푹 잠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혼의 목표입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지식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차가운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느낌은 살아있으며 따뜻한 체험입니다. 당신 사람들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마음 깊이, 내 존재 깊이, 내 영혼 깊이 받아들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내 자신이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 자체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사랑의 행위가 뒤따라옵니다.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사랑이 나한테서 이웃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나에게로 흘러나간 그 사랑은 다시 더 큰 사랑으로 나한테로 흘러들어옵니다. 이러한 사랑의 교환이 있는 곳에 우리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제대에 봉헌하면서 노래할 것입니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거기 계시도다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