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틀과 가면

사실 저는 처음 수도원에 입회할 때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교리나 신학도, 수도생활도 뭔지 잘 모르고 그냥 예수님이 좋고, 수도원이 좋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앳된 모습으로 수도원에 들어오니 모든 수사님들이 너무나도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도원 생활도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전례와 개인기도, 일은 조금 고되었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학교 공부도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공부한 것을 큰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적기만 하면 되니, 한결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한해 두해가 가면서 그 행복은 차츰 시들어가고, 형제들 안에서 오는 갈등과 어려움들을 체험하면서 웃음을 잃어 가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과 선배들의 수도원에 대한 불평, 사람에 대한 불만, 소임지에 대한 불평의 소리를 들으면서, 저 또한 그렇게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며,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지, 왜 그렇게 사는지, 왜 성격은 그런지’ 등 생각하며 불만에 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각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형성된 모난 자신의 틀이 다른 형제의 틀과 부딪혀 둥글둥글하게 변하여 하느님 마음을 배우는 과정에 불과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아프다고 소리쳤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부딪혀 아파하며 지내던 가운데 어느 듯 수련이 지나고 첫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방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스스로 책임감 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큰 방에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잠자며 공동으로 살 때와는 달리 유기서원자로 한해 두해 살아가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자기 자신에 대한 큰 실망감이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사람에게 하던 불평, 불만이 어느 듯 자신에게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안셀모! 너 이렇게 살아서 수도자라고 할 수 있겠나? 좀 잘 살자. 왜 그리 속이 좁냐?’예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쏘았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불평했던 수사님들의 모습자체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저렇게 몇 십 년 이상 묵묵히 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점점 저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선배 수사님들처럼 일생토록 이 생활을 해 나갈 자신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남들이 잘 산다고 말해주는 것과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살지 못하는 이기적인 저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삶에 대해 후회하는 날이 많아 졌고,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종신 서원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그렇다면 그동안의 내 수도생활은 모든 것이 불만과 실망으로 가득 차 버렸구나, 무엇이 문제 일까? 잘 살려고 그렇게 애써 왔는데, 남은 것은 불만과 실망스러움 뿐이니.... 예수님과 형제들과 함께 하는 삶이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과연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시고, 함께 사는 형제들은 내 삶에서 무엇인가? 나는 그분 때문에 이 생활을 한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왔는데... 내 안에 과연 얼마나 예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드려 왔는가? 너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안을 벗어나, 너 혼자 힘으로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하려고 애쓰며 살아 온 것은 아닌가?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너는 수도 생활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너만의 틀을 만들어 놓고,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그리고 나중에는 너 자신을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부단히도 노력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다. 너는 너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틀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이 틀을 부수어 버리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말자...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너는 너 스스로에게 지쳐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내가 갖고 있는 잘 살아야 한다는 그 틀에서 이제 좀 물러나자. 예전에 어느 신부님께서 강론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냥 있는 그대로 살자. 너 있는 그대로! 수도생활은 나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 의탁하자!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도와 달라고 청하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서서히 마음의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욕심 없이, 말없이 주어진 일에 묵묵히, 하루 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며 조용히 그분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것’ 그것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주어진 삶을, 그리고 마주 오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애쓰며 살다보면 주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고, 어디에도 완벽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불러 주신 하느님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주님의 사람으로 그분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삶의 틀을 부수고(부수지 못한다면 좀 더 유연해져서), 두 얼굴의 가면을 벗고,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 안에 모시도록 나를 비우고 현재를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말처럼 이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질과 성향, 자라면서 받은 교육과 환경, 그리고 많은 상처와 욕심들이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나름대로 안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갇혀 있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마음 안에 자신을 가두는 틀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 틀에 맞추어 사람들과 사건들,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 지는 나’와 ‘홀로 있을 때의 나’, ‘하느님 앞에 있을 때의 나’가 분열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은 교회 내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소위 열심하다는 사람들에게서도,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사실 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 센 완고함과 지도자들의 위선에 대해 심하게 질책하시는 구절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이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일생동안 해야 할 일은 마음 안의 견고하게 만들어진 틀을 부수어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담는 일, 위선의 가면을 벗고 늘 한결같이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고, 봉헌회 활동을 하는 것도 결국은 거짓된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여 그분의 그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나누며 살기 위해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 사랑과 평화를 누리고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매 순간 순간, 그리고 우리 생애 마지막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성직자로 살았느냐, 수도자로 살았느냐, 평신도로 살았느냐, 혹은 너는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너 얼마나 많이 사랑하며 살았는가?”라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은 우리의 틀을 부수고 우리의 가면을 벗게 하는 가장 훌륭한 은총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될 때, 이미 우리는 여기서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이 우리 마음의 견고한 틀과 녹여 주시고, 위선자의 가면을 벗겨 주실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과 은총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이들의 용서와 자비, 기도와 관심을 통해 표현됨을!!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