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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함께 우리는 추석을 지내고 있습니다. 추석 한가위는 돌아가신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며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정과 삶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우리 수도 선배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특히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은 연길 수도원의 주보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은 1928년부터 1946년 중국 공산 정권에 폐쇄되기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힘들게 살던 우리 조선 신자들과 중국 신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수도원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거룩한 십자가를 연길 수도원의 주보로 모셨는지는 모르지만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이 수도원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연길 수도원의 백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님의 생애를 보면서 십자가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합니다.

백 아빠스님은 우리 이름으로는 ‘백화동’이십니다. 1889년 독일 아우스부륵 교구 오토 보이렌에서 태어나시어,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1년 첫 서원하고 1915년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극동 아시아 선교를 위해서 아빠스님은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여 1921년에 중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셨습니다. 1922년 연길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연길 분원장까지 맡으면서 간도지역 선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셨습니다. 1928년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 9월 5일 연길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피선되셨습니다. 그리고 1937년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 후 아빠스로서 또 주교로서 수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중국 공산 정권에 폐쇄되고,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중병에 걸려 1949년 12월 12일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셨습니다. 마침내 일 년도 못되어서 1950년 11월 2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백 아빠스님은 독일로 귀환하는 길에 로마에 들려 교황님을 알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교황님이셨던 비오 12세는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아빠스님을 심하게 야단쳤다고 합니다. 또 오틸리엔으로 도착해서 보니,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 줄 줄 알았던 당시 총아빠스님 크리소스토모 아빠스님을 비롯한 거의 모든 수도자들의 눈길은 너무나도 차가웠습니다. 덕원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생사를 모르는 상황인데 비겁하게 선교지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질책이었습니다. 또 경제적 이유에서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연길 수도원의 독일 형제들을 홍콩을 통해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해서 아빠스님을 많은 빚을 져야 했고 이 빚은 고스란히 오틸리엔 수도원이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백 테오도로 아빠스님은 알게 모르게 더 많은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 독일에서 휴가 중인 주 보나벤뚜라 수사님도 말하기를, 당시 오틸리엔 수도자들은 너무 냉대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몇 년 후인 1954년 덕원 수도원 출신 독일 형제들이 귀환했을 때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는데, 반면에 연길에서 온 형제들은 냉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명히 백 테오도로 아빠스님은 내적 충격을 아주 심하게 받으셨을 것이고, 이 충격과 고통이 바로 그분의 병을 더 악화시켜 그토록 빨리 삶을 마감하게 했으리라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난 달 오틸리엔 수도원에 갔을 때 저는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는 백 주교님의 무덤을 찾아 참배했습니다. 침묵 중에 있는 그분의 무덤에서 그분이 짊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사실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이러한 십자가의 무게를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느 누가 이러한 십자가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온전히 당신 혼자 지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운명을 당신 운명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처럼 백 주교 아빠스님은 남들은 몰라주지만 자신만이 져야할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지고 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당신이 장상이었던 연길 수도원의 주보 거룩한 십자가를 참으로 당신 삶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비록 당신 당대에는 복음의 꽃이 활짝 피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곳에서는 그때 심었던 복음의 씨앗이 조금씩 조금씩 움터나고 있습니다.

형제여러분, 우리는 9월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피를 흘려 신앙을 증언한 분들만이 순교자가 아닙니다. 순교는 하지 못했지만 삶 전체가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분들 역시 참된 순교자이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십자가일 수 있고 또 어떠한 상황이 나에게 십자가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십자가를 대신 질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는 십자가만을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내가 기꺼이 질 때, 그 십자가에서 구원과 해방의 힘이 솟아납니다. 내 십자가를 통해 함께 사는 형제들,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또 우리 자신도 우리 선조들과 우리 수도 선배들이 묵묵히 지고 갔던 그 십자가의 은덕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때 부르는 이 노래가 우리 삶이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우리 구원이 달렸네, 어서 와서 경배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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