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다해

  고 이사악 신부

루카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어느 마을에 들어가시자 나병환자 열 사람이 마주 오더니 멀찍이서 소리 높여 외쳤다. “예수 스승님, 불쌍히 여기소서!”예수께서 보시고 “가서 제관들에게 몸을 보이시오”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는데,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다니!”그러고는 그에게 말씀하셨다.“일어나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도입말

오늘 연중 제28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나 나병을 치유 받게 된 사마리아인을 만납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나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치유를 받은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 예수님의 행위는 오다가다 받은 단순한 의료행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똑같은 일이지만 어떤 이의 눈에는 일상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되고, 어떤 이의 눈에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경이로운 시각으로 대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구원의 사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특별히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성 라바누스 고등학교 동문회원들이 공동체 미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은인들이기도 한 이 분들이 한국 방문 일정동안 한국의 정취를 많이 느끼고, 남은 일정이 유익하고 안전하길 기원하면서 이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강론

강론을 준비하면서 달력을 한 번 확인해봤습니다. 왜냐하면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었는데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번 주일이 구라주일이 아닐까 달력을 뒤적여 봤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이지 예전에는 분명히 있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하고 달력 첫 장부터 다시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구라주일을 달력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구라주일을 지내면서 나환우들을 기억하고 돕기 위하여 2차 헌금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제 머릿속에서 아직도 구라주일이 남아있는 것은 그 이름도 우습거니와(구라가 무슨 뜻인지는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나병에 관한 참혹한 이미지 때문입니다. 한센씨 병이라고 부르는 이 병은 굳이 그 증세에 대해서나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형벌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질병입니다. 이런 병에 걸렸다가 깨끗이 치유가 되었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구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경우를 보자면 온 나라 군대가 자기 손아귀에 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지만 나병으로 말미암아 사는 맛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 역시 나병에 걸려 고향에서 쫓겨나서 동냥하면서 설움 속에 살았으니 이 몹쓸 병이 그의 삶을 옭죄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병에서 치유되면서 맛보았을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이 듭니다. 삶이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오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빛나게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기분을‘구원 받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구원이란 말은 해방, 속량, 치유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죽다가 살아나고, 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온갖 속박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표현한다고 하겠는데 이는 신체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앗아갈 수 있는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어떤 분깃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에서 그야말로 활기차고 생기 찬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죽지 못해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이유는 그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사건, 곧 빠스카를 통해서 하느님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떠돌이 유랑민족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정체성이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건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거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런 구원의 사건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벌어집니다.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계집종으로부터 엘리사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날도 동료들과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무심하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즉시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이 기적을 자주 일으키는 한 설교가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연히 벌어진 게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던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아만 역시 자신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고 온 세상 가운데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도 매순간 벌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의 치유를 받고도 그 놀라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마음이 무덤덤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기야 지금 세상에는 나병을 깨끗이 고치는 일만큼이나 경이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때에 따라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일상의 작은 일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이렇게 복잡하고 우리의 정신을 혼란케 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믿음의 시각을 견지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서이고 구원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목표요 완성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