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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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제 목 :  그리스도왕 대축일: 인 끌레멘스 원장 신부 07-10-14 22:13:3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912   
붉은 저녁해 창가에 머물며 내게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하네. 놀던 아이들 다 돌아간 다음의 텅 빈 공원 같은 내 마음엔 하루 종일 부우언 먼지만 쌓이고.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저녁빛에 잠겨 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먹임에 귀 기울이네. 부서진 꿈들... 시간의 무늬처럼 어른대는 유리 저편 풍경들...


이 시는 남진우 시인의 ‘저녁빛’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들으면 살아온 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고, 삶은 때로 그 얼마나 덧없고 쓸쓸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이번 주간이 교회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한 해에서 다음 한 해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이 우리가 살아온 삶을 더욱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자문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무엇이 이리 바쁜가,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여기까지 밀려온 세월은 또 무엇인가? 언제 한번이라도 나 자신을 조용히 들여다보며 지나온 삶을 뒤적여본 적이 있던가?” 이처럼 우리가 걸어온 삶의 뒤안길을 볼 때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여기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우리 모두는, 특히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의 주님, 세상의 참되고 유일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단순히 인간적인 후회나 상념에 빠지고, 심지어 절망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부정적인 죄의식만을 더욱 깊게 하고, 그 사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더 이상 일어날 힘도 살아갈 힘도 없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죄의식은 사람을 죽이는 죄의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눈으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하느님의 차원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언젠가는 직면해야할 최후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영광중에 오셔서,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의인과 악인을 갈라,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 의인들은 천국으로, 저주를 받은 자들인 악인들은 지옥으로 보내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심판은 먼 훗날에 일어날 일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되돌아보는 바로 오늘이 바로 종말의 때이고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최후심판 때 모든 삶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눈으로 지금 우리 삶을 보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추어진 어두운 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죄의 인식은 부정적인 죄의식하고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초세기 위대한 교부인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죄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인식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보다 위대하다.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여 항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세상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천사를 보는 사람보다 위대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우리가 범하는 죄는 다름 아닌,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집이 없는 지극히 작은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무자비함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들은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를 보면, 하느님 친히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하느님의 자비 자체가 바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자비한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베푸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우리는 모두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자비를 빚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자비를 베풀었는가에 대해 셈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심판 때 자비 지극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느냐 아니면 분노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느냐는, 우리가 바로 오늘 지금 우리 형제에게 자비를 베푸느냐 아니면 우리 형제를 무자비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 시간을 허락해 주시는 인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규칙서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악행을 고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날들을 연장시키신다.” 또 규칙서는 계속 말합니다. “우리가 지옥 벌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아직 겨를이 있고 육신 생명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을 현세 생명의 빛으로 다할 수 있는 동안에 영원토록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당장에 달려 실행하자.”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의 삶을 늦추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전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우리가 체험하고, 우리가 체험한 당신의 자비를 우리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우리의 지상 삶을 연장해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가는 우리의 현세 시간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죄를 범하여 헐벗은 형제와 자매를 본다면, 그대 사랑의 옷을 그들에게 입혀주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랑과 용서에서 알도록 하십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주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 미사를 지냅니다. 조금 있으면 예물 봉헌 때 우리는 한 해 동안 우리가 땀 흘려 가꾼 수확물을 왕이신 주님께 온전히 내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바칠 예물 가운데 가장 빛나고 가장 값있는 예물은 우리가 작은 형제에게 베푸는 자비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부터 너희를 위해 마련해 둔 나라를 상속받아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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