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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04 19:11
머튼의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평가1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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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는 그리스도교에 속한 린 데 실라(Lynn de Silva), 레오날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존 코브(John B. Cobb), 알로시우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와 프레드릭 스트렝(Frederic J. Streng) 그리고 불교에 속한 키타로 니쉬다(Kitaro Nishida), 스즈키(D.T. Suzuki), 마사오 아베(Masao Abe) 등과 같은 많은 개척자들이 있다. 토마스 머튼도 이러한 개척자들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서 머튼의 고유한 공헌은 무엇이었나? 보니 보니 떠르스톤(Bonnie Thurston)은 두 전통 모두에서 인간 체험의 급진적인 변형이 유사하다는 것을 본 머튼이 서구의 이원론을 넘어 불교를 향해 존재론적인 접근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i] 존 다도스키(John Dadosky)는 개척자로서 머튼의 성공은 경험적이고 영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종교간 대화를 위한 상호 자기-중재의 방법의 사례를 제공한 그의 삶과 그의 불자들과의 우정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ii] 라브(Raab)는 관상가들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머튼은 다른 종교들, 특히 불교를 향한 개방과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의 확인인충실성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여는 데 기여하였다고 논한다.[iii] 로버트 킹(Robert King)은 자신의 저서, 토마스 머튼과 틱낫한에서 머튼의 관상적 대화의 방법을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선구자적 공헌으로 간주한다.[iv]

          그러나 최근에 존 키넌(John Keenan), 로저 카르레스(Roger Corless), 로버트 샤프(Robert Sharf) 같은 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머튼의 지식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교에 관한 머튼의 이해는 완전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여전히 불교에 대해 배우는 학생이었으며, 이 한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불교에 관한 스즈키의 견해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시아 언어들에 관한 머튼의 미숙함도 불교에 관한 그의 지식의 한계의 한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 그의 한계점들은 아래에서 곧 논의될 것이다.

          이 섹션에서는 좀 더 통합된 관점에서, 머튼이 불교와의 만남에 기여했던 선구자적인 업적들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서 그가 못다 이룬 과제들과 그의 제안들을 조사할 것이며, 그의 생애 마지막에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티벳불교를 체험적이고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것이다.

 

5.1.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위한 머튼의 선구적인 업적들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영역에서 머튼의 선구적인 업적은 다음의 두 가지를 통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 불교에 대한 그의 통합적인 접근, 2) 불자들과의 직접적 접촉과 영적 교류를 통한 그의 우정관계.

          첫째,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현행 동향을 고려할 때, 머튼이 단순히 지적인 수준을 넘어 확장된 통합적 대화의 패턴을 통하여 불교와 교류함으로써 이 대화에 있어 새로운 역동성을 창조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경향은 지적인 대화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보다는 영성적인 대화와 사회 참여적 대화를 통해 통합적인 접근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개발의 결과는 오늘날 서구 중심의 지성적인 대화가 그 한계에 직면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v] 마이클 반즈(Michael Barnes)는 그의 글,“신학적 동향들: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서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서 상호 변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지성적 대화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좀 더 실존적인 수준에서 대화가 보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vi]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전문가인 제임스 프레데릭스(James L. Fredericks)도 그리스도교의 관점으로부터 불교와의 지성적인 대화는 그 한계에 도달했고, 그래서 다른 종교적 전통 특히 불교와의 유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를 개발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은 실천과 관상에 집중해야만 하며, 진리를 찾고 세상에 봉사하는 것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vii] 따라서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 대한 새로운 역동성은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실천은 이론에 배타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영적인 수행과 사회 참여에서 얻은 경험들과 지혜를 나누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새로운 방향은 통합된 만남(integrated encounter)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통합된 만남으로서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현행의 동향은 머튼이 이미 얻으려고 분투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개념적, 체험적 혹은 사회 참여적인 각각의 방법으로 불교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공부를 하였으며, 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자기-변형에 기초하여 불자들과 나눔을 가짐으로써 통합된 만남을 추구하였다. 불교와의 첫 만남은 지성적인 수준에서였으나, 그의 禪 체험에 대한 관심은 불교 안에서의 종교적 체험과 자기-변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내적 자아, 영적 수행, 종교적 체험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 위에 존재론적이고 체험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은 두 종교들의 양립 가능성을 드러내고, 연대적 감각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교에 대한 그의 몰두는 그가 불자들의 종교적 삶과 그리스도인의 관상적인 삶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그는 불교의 수행적인 방법들과 가르침들을 영적 쇄신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관상적 수행 안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사토 젠(Soto Zen, 일본의 曹洞宗)신학적인 믿음의 숨겨진 초기적 형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토젠의 고요한 명상(quiet meditation)수행을 그리스도교 명상 안에 통합시켰다.[viii] 프레데릭스는 토마스 머튼과 같은 가톨릭 수도승들의 선구적인 노력들이 세상의 많은 지역의 로마 가톨릭이 불교 명상을 진지하게 수행하게 했으며, 몇몇 가톨릭 수도승들은 심지어 禪 스승들로서 서품을 받을 정도였다고 말했다.[ix] 깊은 영적인 수준에서 불교의 개념적, 체험적, 실천적 차원을 포괄함으로써 머튼은 불교의 지혜에 비추어 자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예증이 되었다.

          둘째, 머튼은 영적 교류를 통해 불자들과 깊은 우정관계를 맺음으로써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개척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불자들과의 그의 직접적 만남 혹은 서신 왕래는 그들과의 영적인 친교를 얻기 위해 대화의 시작에 우정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었다. 마음을 열고 상호 존중을 표시하는 우정관계, 두 전통의 믿는 이들 사이의 진정한 우정관계는 영적인 삶 안에서 장점과 은사들의 나눔과 성장을 위한 상호 격려를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우정관계는위대한 기쁨의 원천이요 깨달음을 향한 길이며,” 하느님과 인류, 공동체 혹은 개개인 사이의 일치의 방법이다.[x] 이러한 친구들 사이의 사랑이 중개된우정관계는 다른 이들을 향한 자비와 우정관계의 관대한 행동들로 흘러 넘칠 수 있다.[xi] 머튼은 사심 없는 사랑은 우정의 사랑(love of friendship)이라 불릴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상대의 흥미와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善 안에서 안식처가 된 사랑을 말합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xii] 머튼의 우정의 사랑은 자기-초월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우정관계와 하느님과 그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는 이 하느님과의 우정관계를 자신의 흥미와 만족을 넘어 가는 초월적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 특히 불자들과의 우정관계로 확장하였다. 그의 불자들과의 우정관계는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모델이 되었다.

 

5.2. 머튼의 불자들과 불교와의 대화에서의 한계점들

          최근에 몇몇 학자들은 머튼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령맥코믹(MacCormick)머튼은 불교의 입장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들의 신념들을 지나치게 개념화하는 실수를 범했다라고 주장한다.[xiii] 존 키넌(John Keenan)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머튼이 불교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의 시대 안에서 그가 이용할 수 있었던 자료들의 제한 때문에 그의 禪 불교에 대한 이해는 너무 순수했고, 순진했고, 단순했다. 게다가 선불교(禪宗)는 많은 불교의 종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xiv]

 

          다도스키는 키넌의 비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불교에 관한 토마스 머튼의 지식이 스즈키에 대한 그의 의존성으로 손상되었다는 우려는 스즈키의 학문에 대한 반발의 잔재로 보인다.”[xv] 사실, 린자이 젠(Rinzai Zen)의 이마키타 코센(Imakita Kosen) 선사의 평신도 제자인 스즈키는 좌선을 중시하는 사토 젠(Soto Zen)보다는 선문답을 중시하는 린자이 젠(Rinzai Zen)에 집중하였다. 禪에 관한 스즈키의 관점은 단지 禪의 많은 형태와 해석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불교-그리스도교 학회의 공동 창립자인 로저 카르레스(Roger Corless)는 일본의 맥락 안에서 禪에 대한 스즈키의 의문스럽고 이상화된 이해뿐만 아니라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제한된 지식과 오해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xvi] 불교학 교수인 로버트 샤프(Robert H. Sharf)역시 스즈키의 禪은 일본의 국가주의를 포함하는 지성화된 禪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샤프는 이것이 禪의 전통에 의해 자주 의심받았다고 지적한다.[xvii]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튼은 禪불교의 중요한 권위자로서 스즈키를 찬양했고, 禪 에 대한 그의 초월적 해석을 넓게 받아들였다.[xviii]

          그러나 1965년 머튼은 자신이실제로 일본에 있는 禪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고 예수회의 禪 전문가인 윌리엄 존스톤(William Johnston, S.J.)에게 고백한다.[xix] 그는 각각의 고유한 영적 깊이를 간직하고 있는 많은 불교의 종파들과 방대한 읽을 자료들이 있으나 자신은 아시아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많은 자료들을 실제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xx] 실제로 그는 1965년 이전에 출판된, 중국이나 일본의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제한된 불교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관상적 봉쇄 수도원의 수도승이었기 때문에 불교 수행자의 삶을 직접적으로 만나거나 다양한 불교의 종파를 만나기 위한 많은 기회들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머튼의 지식은 스즈키의 禪 불교 혹은 대승 불교에 국한되지 않았고, 그의 불자들과 불교와의 만남은 지적인 지식에 제한되지 않았다. 다도스키는 우리가 불교에 관한 지식을 위해 머튼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키넌의 주장은 실제로 맞지 않다. 머튼 자신을 포함하여 불교에 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들은 우리의 지식이 발전되고 계속 성장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반박한다.[xxi] 실제로 불교에 관한 머튼의 지식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성장했고, 특별히 그의 아시아 순례 동안 티벳불교와 소승 불교와의 만남에서 성장했다. 머튼을 만났던 많은 티벳 불자들은 그의 불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깊은 영적인 수준에서 불교의 명상에 대해 갖는 그의 관심을 존경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아시아 여정 전에 머튼을 만났던 데이비드 스테인들-라스트(David Steindl-Rast)는 머튼이 禪에 관한 방대하고 우수한 이론적 지식을 가졌다고 말했다.[xxii]

          머튼의 불교에 관한 이해의 깊이에 대한 문제를 따로 남겨둔다 하더라도 불교와의 그의 만남을 지적인 지식에만 제한할 수는 없다. 머튼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불교를 향한 그의 통합된 접근과 종교간 대화를 위한 다양한 접근들을 다루어야 한다. 게다가 머튼의 불교와의 대화는 종교간 대화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머튼의 예를 들어 래리 패더(Larry A. Fader)는 그의 글, “Beyond the Birds of Appetite,”에서 스즈키와 禪에 관한 일본인 학자들의 해석과 머튼의 만남은 종교간 대화의 모범을 보여주는 최고의 것이었으며, 진리를 향한 머튼의 헌신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xxiii] 나아가 다도스키는 머튼의 삶이 상호 자기-매개의 방법과 우정관계를 통해 종교간 대화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자적 업적을 계승해야 한다고 제안한다.[xxiv] 머튼은 비록 불교에 관한 그의 비전이 제한되었다 할지라도 상호 배움, 종교적 체험과 영적 수행의 나눔을 통해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종교간 대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키넌의 머튼에 대한 또 다른 비평은, 공통된 인간성과 종교적 체험에 대한 머튼의 강조가 종교간 대화에 관한 그의 이해를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40년 간의 대화에서, 새로운 통찰이나 새로운 접근을 제공하지 못하는, 공통된 인간성에 관한 같은 오래된 토대를 자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화에 지쳐 있다…. 모두 잘되고 좋은 듯하나 사람들은 종교간 대화를 지루해 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xxv] 그는 계속해서 체험적인 대화를 비판하여 체험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경험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대화 그 자체는 언어나 말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논하고 있다. 지난 40(지금은 50) 동안 불교-그리스도교의 대화에 관한 그의 평가는 지루하고 표면적이고 적은 가시적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xxvi]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에 대한 저항으로 체험적인 대화가 심각한 한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 장애물들이 생겨나는 주된 이유는, 경험이나 인간의 공통점에 집중하기 보다는 지적인 대화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그것을 평가 기준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몇몇 불자들만이 불교의 믿음과 수행에 도전이 되는 그리스도교의 지적인 토론들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좀 더 기본적인 단계에서 그들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 얻어진 지식과 가설은 영적 성장을 위해 유효한 바탕이 아니라고 믿는다. 단순한 지적 대화를 넘어 영적 사회적 연대는 그들의 공통점 혹은 보편적 인류애를 깨달은 사람들 사이의 마음과 마음의 대화에 기초한 두 전통 사이에 반드시 형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이클 피츠제랄드(Michael L. Fitzgerald) 대주교는 형제적 관계는 인간의 공통적 기원이며, 하느님의 영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xxvii] 라브(Raab)인간학은 그 자체로 인간의 여정에 대한 토론을 더 순조롭게 하며, 인간의 체험과 이해와 반영의 적법한 범주로서종교적혹은 영적인것을 포함한 종교간 대화를 위한 토대로서 인간 여정의 성취이다라고 제안하였다.[xxviii] 공통된 지평의 나눔을 통한 대화는 초월(transcendence) 혹은 상호 변형(mutual transformation)을 이끌 길이 될 수 있다.

          성숙한 머튼은 인간의 언어나 교의를 넘어 마음과 마음의 대화, 가슴과 가슴의 대화를 통하여 불자들에게 다가갔다. 카르(Carr)머튼의 확신은 종교들 간의 중요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들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영적인 가족 안에서 언어적 차이와 언어적 소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xxix] 불자들과 머튼의 관상적인 대화는 우리가 언어적인 소통으로부터 말을 넘어 영적인 친교(spiritual communion)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보여 준 예증이었다. 키넌은 그가 체험적 대화에 대하여 비판할 때, 머튼의 영적인 친교를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신비체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 때문에 체험에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과 해석들이 있으며, 체험적 대화를 통해 이러한 차이들이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머튼은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열매는 서로 다른 종교적 조직들 사이의 일치도 아니요, 다른 종교들에 관한 확장된 지식을 얻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영적인 교류와 나눔을 통해 영적인 친교와 상호 변형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i]See Thurston, “Thomas Merton: Pioneer of Buddhist-Christian Dialogue,” 126-128.

[ii]See John D. Dadosky, “Merton as Method for Inter-Religious Engagement,” 33-43.

[iii]See Joseph Q. Raab, “Insights from the Inter-Contemplative Dialogue: Merton’s Three Meanings of ‘God’ and Religious Pluralism,” The Merton Annual 23 (2010), 90-105.

[iv]See King, Thomas Merton and Thich Nhat Hanh, 11-24.

[v]예를 들어,Ovey Mohammed교수는 오늘날불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한다는 사실에 경고하고 있다.불자들은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깊은 체험에서 흘러나온다면,하느님에 관한 말들은 그 때 유일하게 진정성을 지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라고 지적했다.See Ovey N. Mohammed, “Buddhist-Catholic Dialogue,”Celebrate 31, no. 6 (1992), 14. Nhat Hanh만약 우리가 우리 존재의 깊은 근본에 닿는다면,모든 지적인 개념들은 초월되어야 한다라고 진술했다.See Thich Nhat Hanh, Going Home: Jesus and Buddha as Brothers (New York: Riverhead Books, 1999), 12.

[vii]See Fredericks, Buddhists and Christians, 98-105. Winston King에 따르면,단순히 명상을 하는 것은 진정한 실존적인 만남이 아니라일종의 심신에 관련된 실험이며, “단순히 종교적 신념들에 대한 지적인 토론을 하는 것은 종교 간 대화가 아니라,단지 종교 간 토론이다.” See Winston L. King, “Buddhist-Christian Dialogue Reconsidered,” Buddhist-Christian Studies 2 (1982), 6; Winston L. King, “Interreligious Dialogue,” in The Sound of Liberating Truth: Buddhist-Christian Dialoguesin Honor of Frederick, eds. Sallie B. King and Paul O. Ingram (Richmond, Surrey: Curzon, 1999), 49.

[viii]MZM, 36, 37.

[x]William Johnston, The Mirror Mind: Zen-Christian Dialogue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0), 160.

[xi]John D. Dadosky, “The Church and the Other:Mediation and Friendship in Post-Vatican IIRoman Catholic Ecclesiology,”Pacifica 18 (October 2005),316.

[xii]Thomas Merton, Seeds of Destruction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64), 261 (여기서부터Seeds of DestructionSD로 축약).

[xiii]MacCormick, 802. 예를 들어,맥코믹에 따르면,머튼의 에세이 열반은 禪에 대한 지나친 개념화의 눈에 띄는 예이다.머튼은 열반을 완벽한 사랑의 지혜로 정의하고 있지만,궁극적 실재를 개념화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앞의 책, 812; see also ZBA, 84.

[xiv]Keenan, 123, 126-127.

[xv]John D. Dadosky,“Merton’s Dialogue with Zen:Pioneering or Passé?”Fu Jen International Religious Studies 2, no. 1 (Summer 2008), 71.Dadosky 많은 학자들이 현재 스즈키를 비판하는 것은禪에 대한 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며,禪을 대중화 하는 이로서의 그의 성공이 서구 학자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이러한 비평들은 스즈키가 禪을 잘못 전했다고 믿는 것일 뿐만 아니라,그가 수많은 종파들과 교의적인 측면들을 지닌 다양하고 복잡한 불교의 혈통들을 무시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