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무골 성지)

개인적인 느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왜관 수도원에 있는데, 왜관에서 대구 쪽으로 가는 국도 8 km 되는 지점에 ‘신나무골 성지’가 있습니다 (주1). 소규모로 개발된 곳인데, 당시 신자촌 이었습니다. 거기에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소가 있습니다. 순교하게 된 경위는 30 km 떨어진 곳 출신인데, 이곳에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네 식구 일가족입니다. 부부와 두 아들입니다. 하루는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서 옹기로 숨었습니다. 결국 발각되었습니다. 포졸들이 묻습니다. ‘배교하겠느냐?’ 그랬더니, 남편과 둘째아들은 그 자리에서 ‘안 믿습니다’ 하고 배교하였습니다.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아내 이선희 엘리사벳과 맏아들은 ‘죽어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소’ 하고 그 자리에서 잡혀갔습니다. 이제 비극이 그 한마디로 갈립니다. 두 사람은 한마디에 살아남고, 다른 두 사람은 죽음의 길로 갑니다. 혹시 따로 따로 잡혀서 한쪽에서는 배반하고 다른 쪽은 순교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붙잡혀서,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자기가 죽게 될 때 이 집안이 어떻게 될 것이며, 애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왜 생각을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한마디로 두 운명이 갈렸습니다. 묘지 뒷면에 생애에 대해 설명이 있습니다. 맏아들 이름이 없습니다. 그냥 ‘배도령’ 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순교자로 죽으면 천주학쟁이라고 호적에서 빼버립니다. 배씨라는 것만 알지 이름은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배도령’ 이라고 지었습니다.

(한티 성지)

거기에서 32.8 km 떨어진 팔공산 800 m 고지에 ‘한티 성지’가 있습니다 (주2). 그 당시 신자촌 끼리는 연락이 되는 데, 한쪽에서 포졸들이 들이닥치면 몸을 피신해야 합니다. 천주학쟁이라고 발각되면 야단나니까, 다른 신자촌으로 가야 숨 한번 옳게 쉬고,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순교자들이 피신하는 통로인데, 지금은 성지순례길입니다.

10여년 전 수련장으로 있을 때 수련자들과 함께 순례했습니다. 평지 80리가 아니라 산을 오르고 내리는 길이므로 아침 9시에 출발하면 오후 4시 반까지 꼬박 7시간 반 동안 걸었습니다. 사순절 3월말 이었습니다. 연두색 이파리가 돋아나고 개울물 흐르고 유쾌한 산보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으면서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피해가던 길이다’는 마음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7시간 반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마디 ‘죽어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소’ 어떻게 그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계속 의문이었습니다. 한 아낙의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순교자들 어쩌면 그렇게 멍청한 사람들입니다. 그때 “믿느냐?”, “안 믿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석방입니다. 그런데 “믿습니다” 하면 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한번쯤 거짓말하면 어때요? 속으로 믿으면서 거짓말하면 되지요. 그러면 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믿으면 되지요. 정 찝찝하면 이사 가서 다른 곳에 살면서 믿으면 되지요.

(순교 이유, 왜 순교하였을까?)

그런데 이 사람들 그 한마디를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죽고 싶어 했을까요? 그래서 형장에 끌려갔습니다. 한 번에 죽으면 끌려갈 만하지요. 그런데 역사영화를 보면 주리를 틀지요, 발 묶어놓고 정강이뼈가 으스러지도록 틀어댑니다. 거기에 시뻘겋게 달군 인두로 무릎을 지저댑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 묻혀있는 순교자의 말 ‘죽어도 천주님은 배반할 수 없소.’ 이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7시간 반 동안 걸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의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리지식을 받았겠습니까? 아이고, 교리지식? 그 당시는 한문으로 쓰여 있고 여자들은 양반집 규수나 별당아씨나 글을 배웠지 보통 글 못 배웠지요. 또 책을 가지고 있을 시대가 아닙니다. 천주학쟁이 책 가지고 있으면 목 달아났겠지요. 책이 있어도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교리지식을 받았겠습니까? 성사생활을 옳게 했겠습니까? 할 수 없지요. 조선팔도에 62년간 신부가 없습니다. 있다하더라고 한두 명 있었고,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습니다. 코 크고 머리 노란 사람들이 어디를 다닐 수 있습니까? 삿갓 쓰고 다녔지요. 사람 다니는 길 피해서 외딴 길로 갔지요.

(살티 성지)

부산에서 대구로 오다 보면 ‘언양’ 이란 곳이 있는데, 여기에 ‘살티 성지’가 있습니다 (주3). 거기에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신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부님 오셨다하면 서로 통신망 통해 몇 시 오시니 와서 고백성사하고 미사참례하고, 그것도 밤에 해가 져서 해 뜨기 전까지 집에 가야합니다. 때로는 30리, 50리 길을 왔다가 갔습니다. 일 년에 한번 있으면 큰 다행입니다. 기도 책도 없습니다.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옛날 할머니들은 ‘예수-마리아’ 정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마리아’ 하는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십자성호 한번 옳게 그을 수 있었겠습니까?

(소설 은화)

‘은화(隱花)’ 라는 책 읽어보셨나요? 유의병 신부님이 쓰신 순교 책입니다 (주4). 박해 끝난 후 유의병 신부님이 처음으로 본당에 부임해 갔습니다. 본당마다 순교 비화가 많습니다. 모두 수집하여 소설로 썼습니다. 거의 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소설화한 것이지요.

신자가 적은 시대이니까, 결혼했는데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천주교 신자요. 배반할 수 없소’ 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당신이 신자이었어요? 나도 신자요” 이번에는 남편이 놀랐습니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이면서도 신자라는 것을 숨기고 살았던 험악한 시대였습니다.

한번 마음 놓고 십자성호를 그을 수 없습니다. 혹시 컴컴한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몰래 십자성호를 그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생활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아무리 교리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구원강생 교리는 알고 있었겠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이것 모르면 신자 될 수 없지요. 가장 기본교리이니까요. 그 부인은 십자성호를 보면서 그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제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 한마디에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니, 내가 살겠다고 그 분을 배반할 수 없소.”

제가 7시간 반 동안 걸으면서 그 의문, 즉 세상이 바뀌어 내일부터 천주교 믿는 사람을 박해한다고 할 경우, 끌려갔다고 합시다. 주리를 틀어댑니다. 인두로 지저댈 때, 과연 내 입에서 무슨 말 할까? 끝까지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소”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도 참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교한 분들이 천명, 이천 명이 아니고, 만 명, 이만명이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불과 120년 전 우리 증조, 고조 할아버지 때 이 땅에 일어난 것입니다.

(주1) 신나무골 성지,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산 57-9

‘신나무골’이란 ‘신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을’이란 의미이다. 신나무(Amur maple)는 단풍나무 과에 속하며, 잎 모양이 세 개로 갈라져 있고, 가운데 것이 길게 늘어져서 마치 긴 혀를 내민 것처럼 보인다. 가을이 되면 새빨갛게 단풍이 든다. 색 있는 나무, ‘색목(色木), 색나무’ 라고 한다. 과거에는 ‘싣나모’로 불리다가 오늘날 ‘신나무’가 되었다. 잎은 삶아서, 회색 ~ 흑색의 물감으로 사용한다. 스님들 옷을 회색 ~ 흑색으로 물들이는 데 사용한다.

(출처 다음 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1XXX5800014 )

(주2) 한티 성지, 경북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 1길 69

(주3) 살티 성지, 경북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11

(주4) 소설 은화(隱花). 윤의병 지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출판.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꽃, 숨은 꽃'이라는 의미이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전후한 때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순교의 길에 나선 가톨릭 신자들의 삶과 신앙을 그렸다. 병인박해 후 가톨릭 신자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저술된 것이다. 기해박해(己亥迫害)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9년부터 잡지 '경향'에 연재되었으나, 저자 윤의병 신부님이 1950년 북한의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미완성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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